2-14【보補】유자여庾子輿의注+① ≪남사南史≫ 〈유역전庾域傳〉에 말하였다. “유자여庾子輿는 자字가 효경孝卿이고 남양南陽신야新野 사람이다. 부친 유역庾域은 효성스런 행실이 있었는데, 모친이 학 울음소리를 좋아하여 유역이 학을 구하려고 애를 쓰자 어느 날 학 두 마리가 날아왔다. 유자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 ≪효경孝經≫을 읽고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이 책은 문장이 많지 않은데 어찌하여 스스로 힘들게 하는가?’ 하고 묻자, 유자여가 ‘효孝는 덕의 근본이니 어찌 대단치 않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답하였다.” 부친이 임지인 파서巴西에서 죽었다.注+② ≪남사南史≫ 〈유역전庾域傳〉에 말하였다. “유역庾域이 파서巴西와 재동梓潼 두 군郡의 태수太守로 있을 때 위魏나라가 파서를 습격하였다. 유역이 굳게 지키다가 양식이 떨어졌는데, 장수와 군사들이 함께 풀을 씹어 먹으면서도 배반할 마음을 갖지 않았다. 〈재직하던〉 고을에서 죽었다.”상구喪具을 받들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파동巴東에 있는
을 거치니, 이것이 바로 삼협三峽의 첫 번째이다. 협곡 중에 구당탄瞿塘灘과 황감탄黃龕灘이 있는데 여름에는 물이 소용돌이쳐 사람들이 하류로 내려가거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를 꺼린다.” 유자여가 가슴을 부여잡고 오래도록 부르짖으니 그날 밤에 수위가 갑자기 낮아져 편안히 하류로 내려갔다. 강을 건너자 수위가 예전처럼 다시 장대해졌다. 당시 사람들이 그로 인해 말하였다.
“염여석이 두건만큼 드러나면 본래 건널 수 없는 법인데, 구당瞿塘의 수위가 낮아진 것은 유공庾公 때문이다.”注+④ ≪고악부古樂府≫ 〈염여가灧澦歌〉에 “〈물위에 나온〉 염여석의 크기가 두건만 해지면 구당에 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注
【두주頭註】
◦ 이지李贄:〈강물의〉 수위가 낮아져 편안히 내려간 것은 본래 유자여庾子輿 때문이나 또한 유역庾域 때문이기도 하다.
역주
역주1淫預石(염여석) :
錢大昕의 ≪廿二史考異≫ 〈南史〉 3에 “巴東에 淫預石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灧澦石이다. 이때 ‘淫’은 ‘灧’과 음이 비슷하여 후세 사람이 물수변(氵)을 추가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淫預石’의 독음은 ‘음여석’이 아니라 ‘염여석’임을 알 수 있다. ≪南史≫ 〈庾子輿傳〉에는 巴東에 있는 염여석은 높이가 20여 丈에 이르며 물이 불어난 가을에는 바위가 물에 잠겨 끝부분만 겨우 보인다고 하였다.
역주2廣谿峽 :
三峽의 하나인 瞿塘峽의 별칭이다. 삼협은 四川省과 湖北省 경내의 揚子江 상류에 있는 3개의 협곡인 瞿塘峽․巫峽․西陵峽의 합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