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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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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中郞 從朔方還注+① 張璠漢記曰 “蔡邕, 字伯喈, 陳留圉人. 六世祖勳, 與鮑宣․卓茂不仕新室. 父稜, 亦有淸白行, 諡貞定.” 續漢書曰 “邕, 通達有儁才, 博學善屬文, 技藝術數, 無不精綜. 仕至左中郎將, 爲王允所誅.”하고 嘗避怨於吳할새 顧元歎 從學琴書한대 專一淸靜하고 敏而易敎 中郞 歎異之曰
必成致리니 今以吾名으로 與卿하노라하니
遂名雍注+② 吳志曰 “顧雍, 字元歎, 吳郡吳人. 連牧州郡, 皆有治迹. 歷奉常․尙書令, 封陽遂鄕侯. 拜侯還第, 家人不知. 爲人, 不飮酒, 寡言語. 孫權嘗曰 ‘顧侯在坐, 令人不樂.’ 位至丞相.”이라
【頭註】
王云 “貞定, 私諡也. 私諡, 唯陳仲弓․陶淵明二人, 可當. 餘多出其子弟門人, 荀爽以爲不宜, 是也.”


7-6【 뒤에注+장번張璠의 ≪한기漢記≫에 말하였다. “채옹蔡邕백개伯喈로, 진류陳留 사람이다. 6대조 조부인 채훈蔡勳포선鮑宣탁무卓茂와 함께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부친인 채릉蔡稜도 청렴결백하게 행동하였고, 시호는 정정貞定이다.”
속한서續漢書≫에 말하였다. “채옹은 사리에 통달하고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며, 광범위하게 배우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각종의 기예와 술수에도 모두 정통하였다. 관직이 좌중랑장左中郎將에 이르렀고, 왕윤王允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고원탄顧元歎(고옹顧雍)이 그에게 의 연주와 서법書法을 배웠다. 고원탄은 배움에 전심치지專心致志하고 마음이 맑고 안정되며, 머리가 좋아 가르치기 수월하였다. 채중랑이 감탄하고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니 오늘 나의 이름을 그대에게 주노라.”
채옹蔡邕채옹蔡邕
고원탄이 마침내 이라고 개명하였다.注+②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고옹전顧雍傳〉에 말하였다. “고옹은 원탄元歎으로, 오군吳郡 사람이다. 을 연달아 다스렸는데 모두 치적을 세웠다. 봉상奉常상서령尙書令을 역임하고 양수향후陽遂鄕侯에 봉해졌다. 양수향후에 봉해진 뒤에 집에 돌아왔는데 집안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의 사람됨은 술을 마시지 않고 말수가 적었으니, 손권孫權이 한번은 ‘고후顧侯(고옹)가 자리에 있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즐겁지 않게 만든다.’ 하였다. 지위가 승상丞相에 이르렀다.”
고옹顧雍고옹顧雍
두주頭註
왕세무王世懋:〈채릉蔡稜의 시호인〉 정정貞定은 〈국가에서 하사한 시호가 아니라 개인이 부여한〉 사시私諡이다. 사시는 오직 두 명의 경우만 타당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그의 자제나 문하생이 지은 것이니, 이 옳다.


역주
역주1 蔡中郞(蔡邕)이……돌아온 : 蔡邕은 평소에 司徒 劉郃(유합)과 관계가 좋지 않았고, 채옹의 숙부인 衛尉 蔡質은 將作大匠 陽球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양구의 장인인 中常侍 程璜이 사람을 시켜 익명으로 채옹과 그의 숙부 채질이 개인적인 일로 유합에게 청탁했는데, 유합이 들어주지 않자 앙심을 품었다고 무고하였다. 棄市刑을 당할 위험에 처했는데, 중상시 呂强이 靈帝에게 간청하여 사형을 면하고 朔方郡으로 유배되었고, 9개월 뒤에 대사면령으로 유배에서 풀려났다.(≪後漢書≫ 〈蔡邕列傳〉)
역주2 新室 : 王莽이 新都侯에 봉해졌기 때문에 前漢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운 新나라를 사람들이 ‘신실’이라고 불렀다.(≪世說音釋≫)
역주3 원한을……있었는데 : 蔡邕이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中常侍 王甫의 아우인 五原太守(楡柳塞로, 현재 內蒙古自治區 五原縣) 王智가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왕지가 춤추면서 채옹에게 춤추라고 하자 채옹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왕지는 본래 교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체면이 깎인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는 “채옹이 불만을 품은 채 조정을 비방한다.” 밀고하자, 靈帝의 총신들도 채옹을 무함하였다. 채옹은 재앙을 피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멀리 吳會지역으로 달아나 12년 동안 泰山羊氏에게 의지하였다.(≪後漢書≫ 〈蔡邕列傳〉)
역주4 : 蔡邕의 ‘邕’자와 통용한다.
역주5 陳仲弓(陳寔) : 187년(中平 4) 진식이 84세로 사망했을 때 대장군 何進이 사신을 보내 제사를 도왔는데, 장례에 참여한 사람이 3만여 명, 상복을 입은 자가 1백 단위로 셀 수 있을 정도였고, 함께 비석을 세우고 ‘文範’이라는 시호를 부여하였다.(≪後漢書≫ 〈陳寔傳〉)
역주6 陶淵明(陶潛) : 427년(元嘉 4) 도잠이 潯陽에서 사망했는데, 그 이후 벗들이 개인적으로 ‘靖節’이라는 시호를 부여하고, 후대에는 그를 ‘陶靖節’이라고 불렀다.(袁行霈, ≪陶淵明集箋注≫ 852∼865)
역주7 荀爽이……것 : ≪後漢書≫ 〈荀淑傳〉에 “개인이 사적으로 자신의 태수와 부친 및 여러 명사들에 대해 시호를 지었는데, 순상이 이에 대해 모두 중요한 의리를 증명하고 경전을 통해 바로잡았다. 비록 모두 변경하지는 못했으나, 역시 자못 수정하게 되었다.[私諡其君父及諸名士 爽皆引據大義 正之經典 雖不悉變 亦頗有改]” 하였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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