冀州刺史
注+① 世語曰 “淮, 字始立, 弘農華陰人. 曾祖彪․祖修, 有名前世, 父囂, 典軍校尉. 淮元康末爲冀州刺史.” 荀綽冀州記曰 “淮見王綱不振, 遂縱酒, 不以官事規意, 逍遙卒歲而已. 成都王知淮不治, 猶以其名士, 惜而不遣, 召爲軍咨議祭酒. 府散停家. 關東諸侯欲以淮補三事, 以示懷賢尙德之事, 未施行而卒, 時年二十有七.” 二子 喬與髦
는 俱總角
에 為成器
라 淮
는 與裴頠․樂廣友善
하여 遣見之
라 頠
는 性弘方
하여 愛喬之有高韻
하여 謂淮曰
論者評之
하여 以為喬 雖高韻而檢不匝
하니 樂言
이 為得
이라 然
이나 竝為後出之儁
注+② 荀綽冀州記曰 “喬, 字國彦, 爽朗有遠意. 髦, 字士彦, 淸平有貴識. 竝爲後出之儁, 爲裴頠․樂廣所重.” 晉諸公贊曰 “喬似淮而疎. 皆爲二千石. 髦爲石勒所害.”이라하다
17-14
기주자사冀州刺史 양회楊淮의
注+① ≪세어世語≫에 말했다. “양회楊淮는 자字가 시립始立으로 홍농弘農 화음華陰 사람이다. 증조부 양표楊彪와 조부 양수楊修는 전대前代에 유명하였고, 부친 양효楊囂는 전군교위典軍校尉였다. 양회는 원강元康 연간(291~299) 말에 기주자사冀州刺史가 되었다.”
순작荀綽의 ≪기주기冀州記≫에 말했다. “양회는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술에 빠져 공사公事를 마음에 두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내기만 하였다. 성도왕成都王(사마영司馬穎)은 양회가 직무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명사라고 하여 아끼고 쫓아내지 않았으며, 불러서 군자의좨주軍咨議祭酒로 삼았다. 집에만 있었다. 관동關東의 제후諸侯들이 양회를 삼공三公에 임명하여 어진 이를 사모하고 덕이 있는 이를 숭상하는 뜻을 보이고자 했으나, 시행되기 전에 죽었으니 이때 나이가 27세였다.” 두 아들
양교楊喬와
양모楊髦는 모두 어릴 때부터 훌륭한 인재였다. 양회는
배외裴頠와
악광樂廣과 친밀한 사이로, 〈두 아들을〉 보내 그들을 만나보게 하였다. 배외는
성정性情이 크고 반듯하기에 양교가 고아한 운치가 있는 것을 아껴서 양회에게 말했다.
“양교는 당연히 경卿에게 미치겠고 양모는 조금 빠지겠습니다.”
악광은 성정이 맑고 순박하기에 양모가 빼어나고 초탈한 점을 아껴 양회에게 말했다.
“양교는 자연히 경에게 미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모는 더욱 뛰어날 것입니다.”
“내 두 아이의 우열은 바로 배외와 악광의 우열이다.”
논자들은 이를 평하여 ‘양교는 비록 고아한 운치가 있지만 언행에 충분히 조심하지 않았으니 악광의 말이 맞다. 그렇지만 둘 모두 걸출한 후진들이다.’라고 했다.
注+② 순작荀綽의 ≪기주기冀州記≫에 말했다. “양교楊喬는 자字가 국언國彦으로 소탈하며 원대한 뜻이 있었고, 양모楊髦는 자字가 사언士彦으로 온화하며 먼 장래를 내다보는 탁견이 있었다. 모두 후진 가운데 뛰어난 자들로, 배외裴頠와 악광樂廣에게 소중하게 여겨졌다.”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말했다. “양교는 양회를 닮아 정교하지 못했다. 모두 이었다. 양모는 석륵石勒에게 살해되었다.
注
◦ 왕세무王世懋:≪세설신어世說新語≫의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악광樂廣이 배위裴頠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