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日
에 迎管公明
하여 共論
한대 公明
이 爲剖析玄旨
하여 九事皆明
注+① 魏志曰 “管輅, 字公明, 平原人. 容貌麤醜, 無威儀, 而嗜酒.” 輅別傳曰 “輅明周易, 聲發徐州. 冀州刺史裴徽擧秀才, 謂曰 ‘何․鄧二尙書, 有經國才略, 於物理無不精也. 何尚書神明清徹, 殆破秋毫, 君當愼之. 自言不解易中九事, 必當相問, 比至洛宜善精其理.’ 輅曰 ‘若九事皆至義, 不足勞思. 若陰陽者, 精之久矣.’ 輅至洛陽, 果爲何尙書問九事, 皆明. 何曰 ‘君論陰陽, 此世無雙也.’”이라 時
에 鄧玄茂
도 亦在坐
注+② 魏略曰 “鄧颺, 字玄茂, 南陽人, 鄧禹之後也. 少得士名, 明帝時, 爲中書郞. 與李勝等爲浮華友, 事發被斥, 後遷侍中尚書. 爲人好貨, 許臧艾以顯官, 艾以父妾與颺. 京師爲之語曰 ‘以官易鄧玄茂.’”한대 言
君見謂善易이어늘 而語不及易中辭義하니 何也오하니
3-13【보補】하상서何尙書(하안何晏)가 스스로 말하였다.
“≪주역周易≫의 뜻에 정통하나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홉 가지 일[구사九事]이다.”
하루는
관공명管公明(
관로管輅)을 맞이하여 함께 토론하였는데, 관공명이 현묘한 뜻을 분석하여 밝혀주자 아홉 가지 일이 모두 분명해졌다.
注+①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관노전管輅傳〉에 말하였다. “관로管輅는 자字가 공명公明이고 평원平原 사람이다. 용모容貌가 거칠고 추하여 위의威儀가 없었으며 술을 좋아했다.”
〈관로별전管輅別傳〉에 말하였다. “관로는 ≪주역周易≫에 밝아 이름이 서주徐州에 퍼졌다. 기주자사冀州刺史 배휘裴徽가 그를 수재秀才로 선발하고 ‘하상서何尙書(하안何晏)와 등상서鄧尙書(등양鄧颺)는 나라를 경영할 재주와 책략을 지녔고 사물의 이치에 대해 정밀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하상서는 정신이 명철하여 추호秋毫같이 미세한 것도 거의 간파하니, 그대는 신중하십시오. 스스로 ≪주역≫ 중의 아홉 가지 일을 모른다고 말하니, 틀림없이 그대에게 물을 것입니다. 낙양洛陽에 도착하거든 의당 그 이치를 잘 밝혀주십시오.’ 하자, 관로가 ‘만약 아홉 가지 일이 모두 지의至義라면 애써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음양陰陽 같은 것은 정밀히 공부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였다. 관로가 낙양에 도착하자 과연 하상서가 아홉 가지 일에 대해 물었는데, 모두 분명하게 대답하니, 하상서가 ‘음양陰陽에 대한 그대의 논의는 이 세상에 대적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등현무鄧玄茂(
등양鄧颺)도 자리에 함께 있다가
注+② ≪위략魏略≫에 말하였다. “등양鄧颺은 자字가 현무玄茂이고 남양南陽 사람으로 등우鄧禹의 후손이다. 젊어서 선비로서 명성을 얻었고 위魏 명제明帝(조예曹叡) 때에 중서랑中書郞이 되었다. 이승李勝 등과 경박하게 교우했다가 일이 드러나자 비난을 받았고, 뒤에 시중상서侍中尚書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됨이 재물을 좋아하여 장애臧艾에게 높은 관직을 주었고 장애는 부친의 첩을 등양에게 주었다. 경사京師 사람들이 이를 두고 ‘관직을 여자와 바꾼 등현무鄧玄茂’라고 하였다.” 말했다.
“그대는 ≪주역≫에 밝다고 하는데 ≪주역≫ 안의 말이나 뜻은 언급하지 않으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체로 ≪주역≫에 밝은 사람은 ≪주역≫을 논하지 않습니다.”
“핵심을 찌르는 말은 복잡하지 않다고 말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