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平子嘗行經陳留郡界러니 陳留는 時爲大郡이요 名有人士라 太守遣吏迎王하니 王問吏曰
舊名此邦有風俗
이러니 果然
이라 小吏
도 亦復知此
注+① 晉諸公贊曰 “蔡, 字子尼, 陳留雍邱人.” 蔡充別傳曰 “充祖睦, 蔡邕孫也. 充少好學, 有雅尙, 體貌尊嚴, 莫有媟嫚於其前者. 高平劉整俊才, 白衣車服奢麗. 嘗語人曰 ‘紗縠, 吾常服耳, 遇蔡子尼在坐, 而終日不自安.’ 見憚如此. 充歷成都王東曹掾, 故稱東曺.” 江氏家傳曰 “江統, 字應元. 東海王越辟爲別駕. 時從事中郞庾子嵩以風韻見重, 雅敬君德, 每云 ‘當今可以爲司徒, 充民望者, 江生其人也.’”라하다
17-16
왕평자王平子(
왕징王澄)가 한번은
진류군陳留郡의 경계를 지나갔는데, 진류군은 당시 큰 고장으로 〈명망있는〉
인사人士가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태수太守가 아전을 보내 왕평자를 맞이했는데, 왕평자가 아전에게 물어보았다.
“채자니蔡子尼(채충蔡充)와 강응원江應元(강통江統)이 있습니다.”
이때 진류군 사람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많았는데, 왕평자가 그들의 성명을 대며 물어보았다.
“아무개와 아무개 등은 그대 고장 사람이 아닌가? 어찌하여 단지 이 두사람만 칭하는가?”
“아까는 나리께서 사람을 물어보신다고 생각했지 벼슬을 물어보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왕평자가 웃고는 그만두었다. 군에 도착하여 태수에게 말했다.
“예로부터 이 고장에는 〈훌륭한〉
풍속風俗이 있다고 유명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말단의 아전도 그것을 알더군요.”
注+①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말했다. “채충蔡充은 자字가 자니子尼로 진류陳留 옹구雍邱 사람이다.”
〈채충별전蔡充別傳〉에 말했다. “채충의 조부 채목蔡睦은 채옹蔡邕의 손자이다. 채충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문아하고 고상하였으며 자태와 용모가 장중하고 엄숙해 누구도 그의 앞에서 경박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고평高平의 유정劉整은 준재俊才로 벼슬이 없는 선비였지만 수레와 의복이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한번은 사람들에게 ‘비단옷은 내가 평상시 입는 것일 따름인데 채자니蔡子尼(채충)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종일토록 스스로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하였으니, 이처럼 사람들이 어렵게 여겼다. 채충은 성도왕成都王의 을 역임했기 때문에 ‘동조東曹’라고 불렀다.”
에 말했다. “강통江統은 자字가 응원應元이다.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불러서 별가別駕로 삼았다. 당시 종사중랑從事中郞 유자숭庾子嵩(유애劉敱)은 풍모와 운치가 있어 존중받았는데, 평소 강통의 덕을 존경하여 매번 ‘지금 사도司徒가 되어 백성들의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는 강생江生(강통)이 바로 적임자이다.’라고 하였다.”
注
◦ 왕세무王世懋:≪채문희전蔡文姬傳≫에서 위공魏公(조조曹操)이 채옹蔡邕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애통해했다고 했는데, 〈주석에 채옹의 손자라는 말이 있으니〉 지금 여기서는 어떻게 후손이 있는 것인가.
注
◦ 왕세무王世懋:또한 그렇지 않다고 바로 말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