過江諸人
은 每至美日
이면 輙相邀新亭
하여 藉卉飲宴
注+① 丹陽記曰 “新亭, 吳舊立, 先基崩淪. 隆安中, 丹陽尹司馬恢之徙創今地.”이러니 周侯
注+② 顗也.가 中坐而歎曰
皆相視流淚
어늘 唯王丞相
注+③ 丞相別傳曰 “王導, 字茂弘, 瑯琊人. 祖覽, 以德行稱, 父裁, 侍御史. 導少知名, 家世貧約, 恬暢樂道, 未嘗以風塵經懷也.”이 愀然變色曰
當共戮力王室
하여 克復神州
니 何至作楚囚相對
注+④ 春秋傳曰 아하다
4-16
사람들은 매번 좋은 날이면
신정新亭으로 서로를 불러
화초花草를 자리 삼아
주연酒宴을 열었다.
注+① 에 말하였다. “신정新亭은 오吳나라가 예전에 세웠는데 전의 터는 무너졌다. 융안隆安 연간(397~401)에 단양윤丹陽尹 사마회지司馬恢之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주후周侯(
주의周顗)가
注+② 〈주후周候는〉 주의周顗이다. 자리에서 탄식하며 말했다.
“풍경風景은 〈강북江北과〉 다르지 않은데 다만 산하山河가 다르구나.”
〈이 말에〉 모두가 서로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왕승상王丞相(
왕도王導)만이
注+③ 〈승상별전丞相別傳〉에 말하였다. “왕도王導는 자字가 무홍茂弘이고 낭야瑯琊 사람이다. 조부 왕람王覽은 덕행德行으로 유명하였고, 부친 왕재王裁는 시어사侍御史였다. 왕도는 젊어서부터 이름이 났는데, 집안이 대대로 빈궁貧窮하였으나 조용하고 활달하며 도道를 즐겨 세상일을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정색하며 말하였다.
“마땅히 함께
왕실王室을 위해 힘을 합쳐
신주神州(
낙양洛陽)를 수복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초楚나라 포로의 꼴을 하고서 서로 마주보는 데에 이르렀단 말인가?”
注+④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말하였다. “초楚나라가 정鄭나라를 치자 제후諸侯들이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정鄭나라가 종의鍾儀를 잡아 진晉나라에 바쳤다. 진晉 경공景公이 군중軍中의 부고府庫를 살펴보다가 그를 보고서 ‘남방南方의 관冠을 쓴 채 묶여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유사有司가 ‘초나라 포로입니다.’라고 하였다. 풀어주게 하고 그의 종족宗族을 물어보자 ‘악공樂工입니다.’라고 하였다.’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선부先父의 직임職任인데 감히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에게 금琴을 주자 남방의 음악(초楚나라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범문자范文子(사섭士燮)가 ‘초나라 포로는 군자입니다. 고향의 악곡樂曲을 연주하니, 옛날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어찌 그를 돌려보내 진나라와 초나라의 강화講和를 이루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注
◦ 유진옹劉辰翁:〈지난 역사를〉 생각해보니 여러 감정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