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5 유령언劉令言(유납劉納)이 처음 낙양洛陽에 들어왔을 때에注+① ≪유씨보劉氏譜≫에 말했다. “유납劉納은 자字가 영언令言으로 팽성彭城총정叢亭 사람이다. 조부 유근劉瑾은 악안현장樂安縣長, 부친 유차劉䖕는 위魏나라 때 낙양현령洛陽縣令이었다. 유납은 사예교위司隷校尉를 지냈다.” 여러 명사名士들을 보고 감탄했다.
“왕이보王夷甫(왕연王衍)는 너무나 이해가 빠르고 총명하며, 악언보樂彦輔(악광樂廣)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고, 장무선張茂先(장화張華)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고, 주홍무周弘武(주회周恢)는 단점을 활용하는 데 뛰어나고,注+②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했다. “주회周恢는 자字가 홍무弘武으로 여남汝南 사람이다. 조부 주비周斐는
이었다.”두방숙杜方叔(두육杜育)은 장점을 활용하는 데 서툴다.”注+③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말했다. “두육杜育은 자字가 방숙方叔으로 양성襄城등릉鄧陵 사람이며 두습杜襲의 손자이다. 두육은 어려서부터 몹시 총명해 신동神童으로 불렸고, 장성해서는 풍모와 태도가 아름답고 재주와 글솜씨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두성杜聖’으로 불렀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국자좨주國子祭酒에 이르렀다.
역주1永寧少府 :
永寧은 삼국시대 위나라에 있었던 太后의 궁 이름이다. 漢나라 이후로 태후의 궁실에는 황제의 궁실처럼 衛尉․少府․太僕의 三卿을 두어 궁실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역주2從事 :
漢나라 이후로 三公 및 州郡의 長官은 모두 僚屬을 자신의 뜻대로 뽑았는데, 이를 ‘從事’라고 칭했다.
역주3中二千石 :
漢代 관리의 爵秩이다. 二千石은 실제로는 1년에 1,440석을 받아서 2천 석에 차지 않았고, 中二千石이 2,160석을 받았다. 한나라 때 중앙 정부의 九卿이 모두 중이천석이었기 때문에 중이천석은 구경의 代稱으로 쓰였는데, 구경은 太常․光祿勳․衛尉․太僕․廷尉․大鴻臚․宗正․司農․少府이다.
역주4洛陽이……때 :
‘永嘉의 亂’을 말하는 것으로, 西晉 懷帝 때인 永嘉 5년(311)에 匈奴族의 劉淵이 세운 漢나라가 永平城 전투에서 진의 주력부대를 섬멸하고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회제를 포로로 잡은 일이 있었다.
역주5納 :
≪晉書≫ 〈劉隗列傳〉, ≪通志≫ 〈劉隗列傳〉, ≪冊府元龜≫ 〈總錄部 品藻〉 등에는 ‘訥’로 되어 있다.
역주6䖕 :
≪世說新語≫와 ≪李卓吾批點世說新語補≫(安永本) 주석에 인용된 ≪劉氏譜≫에는 ‘甝(함)’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