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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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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極殿 始成注+① 徐廣晉紀曰 “孝武寧康二年, 尙書令王彪之等, 啓改作新官. 太元三年二月, 內․外軍六千人始營築, 至七月而成. 太極殿, 高八丈, 長二十七丈, 廣十丈. 尙書謝萬監視, 賜爵關內侯, 大匠毛安之, 關中侯.” 王子敬 時爲謝公長史한대 送版하여 使王題之하니 王有不平色하고 語信云
可擲箸門外라하다
後見王曰
題之上殿 何若 昔魏朝韋誕諸人 亦自爲也라하니
王曰
魏祚所以不長이니이다하니
以爲名言注+② 宋明帝文章志曰 “太元中, 新宮成, 議者欲屈王獻之題榜, 以爲萬代寶. 謝安與王語次, 因及魏時起凌雲閣, 忘題榜, 乃使韋仲將縣梯上題之, 欲以此風動其意. 王解其旨, 正色曰 ‘此, 奇事. 韋仲將, 魏朝大臣, 寧可使其若此? 有以知魏德之不長.’ 安知其心, 迺不復逼之.”하다
【頭註】
劉云 “謂薄待大臣, 固可, 然殿牌比之蹙芻, 擲去, 似爲不可.”
王云 “註更委悉.”


11-29 이 비로소 완공되었다.注+서광徐廣의 ≪진기晉紀≫에 말하였다. “ 효무제孝武帝(사마요司馬曜) 영강寧康 2년(374)에 상서령尙書令 등이 새로운 궁전을 다시 짓자고 아뢰었다. 태원太元 3년(378) 2월에 내군內軍(친위부대)과 외군外軍(작전부대) 6천 명이 건축을 시작하여 7월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태극전太極殿은 높이 8, 길이 27, 너비 10이었다. 상서尙書 은 공사를 감독한 공로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고, 모안지毛安之관중후關中侯에 봉해졌다.” 이 당시 사공謝公(사안謝安)의 장사長史가 되었는데, 사공이 〈현판으로 사용할〉 을 보내 왕자경에게 제자題字하라고 하니, 왕자경이 불쾌한 기색을 띠며 심부름꾼에게 말하였다.
왕헌지王獻之왕헌지王獻之
“문 밖으로 내던져버리시오.”
사공이 이후에 왕자경을 만나 말하였다.
“판에 글씨를 써서 태극전에 올리는 것이 어떻겠소? 옛날 나라의 등 여러 사람들도 스스로 〈그렇게〉 하였소.”
왕자경이 말하였다.
“그 때문에 위나라의 국운이 오래 가지 못한 것입니다.”
사공은 〈이 말을〉 명언名言이라고 하였다.注+남조南朝 에 말하였다. 효무제孝武帝(사마요司馬曜)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새로운 궁전이 완성되자, 논자들이 왕헌지王獻之에게 현판에 글씨를 쓰라고 압박하여 영원한 보물로 삼으려고 하였다. 사안謝安이 왕헌지와 대화를 나누던 차에 (삼국三國)나라 때에 능운각凌雲閣을 건축하면서 현판에 글씨를 쓰는 것을 잊어 즉시 위중장韋仲將(위탄韋誕)에게 사다리에 매달려서 쓰라고 했던 일을 언급했으니, 이로써 왕헌지의 마음을 넌지시 움직이고자 한 것이다. 왕헌지가 사안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정색하면서 ‘그것은 괴이한 일입니다. 위중장은 위나라의 대신大臣인데 어찌 그에게 그와 같은 일을 시킬 수 있습니까. 〈이를 통해〉 위나라의 국운이 오래가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자, 사안은 왕헌지의 마음을 이해하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대신大臣을 야박하게 대한 것은 본래 괜찮지만, 전각의 현판을 처럼 던져 버린 것은 옳지 않은 듯하다고 말한 것이다.
왕세무王世懋:주석이 더욱 자세하다.


역주
역주1 太極殿 : 魏(三國) 明帝(曹叡)가 靑龍 3년(235)에 지은 궁전인데, 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로 皇宮의 正殿을 지칭하였다.
역주2 王彪之 : 305~377. 瑯琊 臨沂 사람으로, 字는 叔虎․叔武, 어릴 때 이름은 虎犢, 시호는 簡이다. 尙書右僕射 王彬의 아들이자 丞相 王導의 5촌 조카이다. 晉나라 著作郞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東海王文學․御史中丞․侍中․廷尉 등을 역임하고 尙書令․護軍將軍․散騎常侍 등에 이르렀다. 謝安 등과 桓溫에 대항하고, 환온이 사망한 뒤에 사안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역주3 謝萬 : 320~361. 陳郡 陽夏 사람으로, 字는 萬石이다. 太常 謝裒의 넷째 아들이자 太保 謝安의 아우이다. 晉나라 司徒掾․護軍從事中郞․吳興太守․西中郞將 등을 역임하고, 豫州刺史․領淮南太守가 되어 前燕을 공격했는데 대패하여 예주가 대부분 함락되었고, 결국 廢庶人되었다.
역주4 將作大匠 : 관직명으로, 宮闕․宗廟․陵寢 및 기타 토목공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秦나라가 처음 설치할 때는 將作少府라고 했는데, 西漢시대 景帝 때에 장작대장으로 개칭하였다.
역주5 王子敬(王獻之) : 344~386. 瑯琊 臨沂 사람인데 會稽 山陰에서 태어났고, 字는 子敬, 어릴 때 이름은 官奴, 시호는 憲이다. 書聖 王羲之의 일곱째 아들로, 역시 書法의 대가이며, 簡文帝(司馬昱)의 사위이자 晉 安帝(司馬德宗)의 장인이다. 秘書郞․司徒長史․吳興太守․中書令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族弟인 王珉과 구분하여 大令이라고 불렀다.
역주6 韋誕 : 179~253. 魏(三國)나라 京兆 사람으로, 字는 仲將이다. 각종 書體에 뛰어난 서법가로, 太僕 韋端의 아들이며, 관직이 侍中에 이르렀다.
역주7 明帝(劉彧)의 ≪晉江左文章志≫ : 명제(439~472)는 彭城郡 綏輿里 사람으로, 字는 休炳, 어릴 때 이름은 榮期이다. 晉 文帝(劉義隆)의 열한 번째 아들이자 孝武帝(劉駿)의 異母弟이다. ≪진강좌문장지≫는 ≪隋書≫ 〈經籍志〉에서는 3권이라 했고 ≪新唐書≫ 〈藝文志〉에서는 2권이라 하였다.
역주8 蹙芻 : 발로 차는 꼴이라는 뜻으로, 하찮은 물건을 이른다. ≪예기≫ 〈曲禮 上〉에 “路馬를 끌고 걷게 할 때는 반드시 길 중앙에서 해야 한다. 발로 노마의 꼴을 차는 것이 죄가 되며, 노마의 나이를 세어보는 것이 죄가 된다.[步路馬 必中道 以足蹙路馬芻有誅 齒路馬有誅]” 하였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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