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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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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佛助注+① 北史曰 “魏收, 字伯起, 小字佛助, 鉅鹿下曲陽人. 少機警, 不持細行. 隨父在邊, 好習騎射, 後折節讀書, 以文華顯. 除太學博士, 至中書監.” 盛譽盧思道注+② 北齊書曰 “盧思道, 字子行. 聰爽俊辯. 年十六, 中山劉松爲人作碑, 以示思道, 思道多所不解. 乃感激讀書, 師事邢子才. 後復爲文示松, 松乃不能甚解. 因就魏收求異書, 才學兼著. 然不持操行, 好輕侮人. 天保中魏史成, 思道多所非毁. 由是再被笞辱, 落泊不調. 楊遵彦薦於朝, 解褐司空行參軍, 兼散騎侍郞.”하고 以詢祖為不及이라하니 詢祖
見未能髙飛者하면 借其羽毛하고 知逸勢冲天者하면 剪其翅翮注+③ 李百藥齊書曰 “盧詢祖, 范陽涿人. 祖父偉, 封大夏男, 父恭道, 蚤卒, 詢祖襲爵. 有術學, 文辭華美, 爲後生之俊. 擧秀才, 官司徒記.”이라하다


5-10【注+① ≪북사北史≫ 〈위수전魏收傳〉에 말하였다. “위수魏收백기伯起이고 어릴 적 이름은 불조佛助거록鉅鹿 하곡양下曲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였으며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부친을 따라 변경에 있으면서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익히기 좋아하였는데, 후에 평소의 뜻을 바꾸어 독서를 하였고 문장의 화려함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태학박사太學博士에 제수되었고 중서감中書監에 이르렀다.” 노사도盧思道에 대하여는 성대히 칭찬하고注+에 말하였다. “노사도盧思道자행子行이다. 총명하였으며 언변이 뛰어났다. 16세에 중산中山유송劉松이 다른 사람을 위해 비문碑文을 짓고 노사도에게 보여주었는데, 노사도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에 발분發奮하여 책을 잃고 형자재邢子才(형소邢邵)를 스승으로 모셨다. 나중에 다시 글을 지어 유송에게 보여주자 유송이 도리어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위수魏收에게 나아가 이서異書를 구하니 재주와 학문이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품행을 조심하지 않고 가볍게 사람을 업신여기기를 좋아하였다. 천보天保 연간(550~559)에 ≪위사魏史≫가 완성되자 노사도가 많은 비방을 하였다. 이 때문에 태형笞刑을 당하는 치욕을 두 번 겪었고 실의한 채 등용되지 못하였다. 양준언楊遵彦(양음楊愔)이 조정에 천거하여 포의布衣에서 벗어나 사공행참군司空行參軍이 되고 산기시랑散騎侍郞을 겸하였다.” 노순조盧詢祖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자, 노순조가 말했다.
“높이 날아오르지 못하는 자를 보면 깃털을 빌려주고, 기세 좋게 하늘로 오르는 자임을 알면 그 날개를 잘라버린다.”注+이백약李百藥의 ≪북제서北齊書≫ 〈노문위전盧文偉傳〉에 말하였다. “노순조盧詢祖범양范陽 涿 사람이다. 조부 노문위盧文偉대하남大夏男에 봉해졌는데 부친 노공도盧恭道가 일찍 죽어 노순조가 작위를 이어받았다. 학문이 뛰어나고 문사가 화려하고 아름다워 선대를 이을 만한 준재俊才가 되었다. 수재秀才로 천거되었고 사도기실司徒記室을 지냈다.”


역주
역주1 魏佛助(魏收) : ≪北齊書≫ 〈盧詢祖傳〉에는 邢邵로 되어 있다.
역주2 北齊書 : 이 내용은 ≪北史≫ 〈盧思道傳〉에 보인다.
역주3 [文] : 저본에는 ‘文’이 없으나, ≪北齊書≫와 ≪北史≫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4 (空)[室] : 저본에는 ‘空’으로 되어 있으나, 安永本과 ≪北史≫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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