支道林
이 還東
注+① 高逸沙門傳曰 “遁爲哀帝所迎, 游京邑久, 心在故山, 乃拂衣王都, 還就巖穴.”할새 時賢
이 竝送於征虜亭
注+② 丹陽記曰 “太安中, 征虜將軍謝安立此亭, 因以爲名.”한대 蔡子叔
은 前至
하여 坐近林公
注+③ 中興書曰 “蔡系, 字子叔, 濟陽人, 司徒謨第二子. 有文理, 仕至撫軍長史.”하고 謝萬石
은 後來
하여 坐小遠
이라 蔡
가 暫起
에 謝
가 移就其處
한대
蔡還하여 見謝在焉하고 因合褥擧謝擲地하고 自復坐라 謝는 冠幘傾脫이어늘 乃徐起하여 振衣就席한대 神意甚平하여 不覺瞋沮라 坐定하고 謂蔡曰
注
劉云 “送一僧, 何至爭近? 至此, 子叔, 小人, 語更深狠.”
13-10
이 동쪽으로 돌아갈 때,
注+① 축법제竺法濟의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에 말하였다. “지둔支遁은 애제哀帝(사마비司馬丕)에게 영접 받아 도성에서 오래 머물렀으나, 마음은 옛 산(동산東山)에 있었기 때문에 곧 도성을 떠나 다시 암혈巖穴(산중山中)로 갔다.” 당시의 현자들이 모두
에서 전송하였다.
注+② 산겸지山謙之의 ≪단양기丹陽記≫에 말하였다. “에 정로장군征虜將軍 사안謝安이 이 정자를 세웠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채자숙蔡子叔(
채계蔡系)은 먼저 도착하여 임공(지도림) 가까이 앉았고,
注+③ 하법성何法盛의 ≪진중흥서晉中興書≫에 말하였다. “채계蔡系는 자字가 자숙子叔으로, 제양濟陽 사람이고, 사도司徒 채모蔡謨의 둘째 아들이다. 문리文理(예의禮儀)를 지녔고, 관직이 무군장사撫軍長史에 이르렀다.” 사만석謝萬石(
사만謝萬)은 나중에 와서 〈임공의 자리로부터〉 조금 멀리 앉았다. 채자숙이 잠시 일어나 〈자리를 비우자〉 사만석이 〈채자숙의〉 자리로 옮겨 갔다.
채자숙이 돌아와서 사만석이 〈자신의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는 방석 째로 사만석을 들어서 땅에 내던지고 스스로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사만석은 모자가 벗겨지고 두건이 비뚤어졌으나 곧바로 천천히 일어나 옷을 털고 자리로 갔는데, 마음이 매우 평온하여 성을 내거나 낙담하지도 않았다. 〈사만석이〉 좌정한 뒤에 채자숙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상한 사람이니, 거의 내 얼굴을 망가뜨릴 뻔 했소.”
“나는 본래 그대의 얼굴에 대해 계획한 것이 아니었소.”
이후에 두 사람은 모두 이 일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注
◦ 유신옹劉辰翁:승려 한 명을 전송하는데 어찌 〈그와〉 가까운 자리를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고, 채자숙蔡子叔(채계蔡系)은 소인배라서 말이 또 매우 패려궂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