寇萊公은 出入宰相三十年에 不營私第라 處士魏野가 贈詩曰
公이 南遷한대 時에 北使至하여 內宴할새 歷視諸宰執하고 語譯者曰
孰是無地起樓臺相公
注+① 王聖塗澠水燕談錄曰 “陝右處士魏野與蒲中李瀆, 俱有高節, 以吟詠相善. 野於東郊鑿土室方丈, 蔭以修竹, 泉流其前, 曰樂天洞.”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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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補】
구래공寇萊公은 내외직을 거치고 재상을 역임하는 30년 동안 개인 저택을 짓지 않았다.
처사處士인
위야魏野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관직이 정내鼎鼐(재상의 자리)에 있으나, 누대를 세울 땅이 없네.”
구래공이 남쪽으로 〈광동廣東 뇌주자사雷州刺史로〉 좌천되었는데, 당시에 북사北使〈금金나라 사신〉가 〈도성 변경汴京에〉 이르러 궁중 연회를 베풀었다. 〈북사가〉 여러 재상들을 두루 보고는 통역관에게 말하였다.
“어느 분이 ‘누대를 세울 땅이 없는’
상공相公인가?”
注+① 에 말하였다. “섬우陝右(섬서陝西)의 처사 위야魏野와 포중蒲中의 은 모두 고상한 절조가 있고, 시를 읊으면서 서로 친하게 지냈다. 위야는 동쪽 교외에 사방 1장丈(약 3미터) 넓이의 토굴을 파고 긴 대나무로 덮으며 그 앞에 샘물이 흐르게 만들고는 악천동樂天洞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