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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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寇萊公 出入宰相三十年 不營私第 處士魏野 贈詩曰
有官居鼎鼐어늘 無地起樓臺라하다
南遷한대 北使至하여 內宴할새 歷視諸宰執하고 語譯者曰
孰是無地起樓臺相公注+① 王聖塗澠水燕談錄曰 “陝右處士魏野與蒲中李瀆, 俱有高節, 以吟詠相善. 野於東郊鑿土室方丈, 蔭以修竹, 泉流其前, 曰樂天洞.”고하다


26-19 【구래공寇萊公은 내외직을 거치고 재상을 역임하는 30년 동안 개인 저택을 짓지 않았다. 처사處士위야魏野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관직이 정내鼎鼐(재상의 자리)에 있으나, 누대를 세울 땅이 없네.”
구래공이 남쪽으로 〈광동廣東 뇌주자사雷州刺史로〉 좌천되었는데, 당시에 북사北使나라 사신〉가 〈도성 변경汴京에〉 이르러 궁중 연회를 베풀었다. 〈북사가〉 여러 재상들을 두루 보고는 통역관에게 말하였다.
“어느 분이 ‘누대를 세울 땅이 없는’ 상공相公인가?”注+에 말하였다. “섬우陝右(섬서陝西)의 처사 위야魏野포중蒲中은 모두 고상한 절조가 있고, 시를 읊으면서 서로 친하게 지냈다. 위야는 동쪽 교외에 사방 1(약 3미터) 넓이의 토굴을 파고 긴 대나무로 덮으며 그 앞에 샘물이 흐르게 만들고는 악천동樂天洞이라고 불렀다.”


역주
역주1 寇準 : 961~1023. 北宋 華州 下邽縣 사람으로, 字는 平仲, 시호는 忠愍이며, 萊國公에 봉해졌다. 太宗 때에 진사에 합격하고, 巴東知縣 등 외직을 거쳐 集賢殿太學士가 되었다. 眞宗 때에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契丹이 침략할 때 여러 사람의 의논을 배제하고 진종이 親征할 것을 청하여 盟約을 이루고 돌아왔다.
역주2 王聖塗의 ≪澠水燕談錄(승수연담록)≫ : 성도는 王闢之(1031~?)의 字로, 그는 北宋 北海郡 臨淄縣 사람이다. 英宗 治平 4년(1067)에 진사에 합격하고, 哲宗 元佑 연간(1086~1094)에 河東知縣이 되었다. ≪승수연담록≫은 왕벽지가 사직한 뒤에 북송 개국 초부터 哲宗 绍聖 연간에 이르기까지 140여 년 동안의 보고 들은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역주3 李瀆 : 955~1019. 北宋 河南 洛陽 사람으로, 字는 河神․長源이다. 16세에 부친상을 치른 뒤에 두문불출하고 경서와 역사서를 섭렵했다. 王祐가 河中尹이었을 때 그를 매우 예우했기 때문에 이름이 크게 알려지고, 王旦․李宗諤과 교유했는데 그들이 벼슬살이를 권할 때마다 그는 모두 거절하였다. 眞宗이 汾陰에 제사지낼 때 孫冕과 陳堯叟가 그를 추천하여 불러 만나려고 했는데, 足疾이 있다는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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