傅茂遠
은 泊然靜處
하고 不妄交遊
注+① 南史曰 “傅昭, 字茂遠, 北地靈州人, 晉司隷校尉咸七世孫. 蒞官常以清靜, 居朝廷無所請謁. 普通五年爲散騎常侍.”하니 袁司徒
注+② 宋書曰 “袁粲, 字景倩, 陳郡陽夏人, 太尉淑兄子也. 父濯早卒, 祖母哀其幼孤, 名之曰‘愍孫’. 好學有才, 淸整持風操. 著妙德先生傳以自况, 嘗慕荀奉倩, 改名爲粲, 字景倩. 齊王功德旣重, 天命有歸, 粲以身受顧託, 不欲事二姓, 由是遇害.”가 每經其戶
에 輒歎曰
經其戶면 寂若無人이나 披其帷면 其人斯在하니 豈得非名賢이리오하다
2-15【
보補】
부무원傅茂遠(
부소傅昭)은 담박하게 고요히 거처하고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다.
注+① ≪남사南史≫ 〈부소전傅昭傳〉에 말하였다. “부소傅昭는 자字가 무원茂遠이고 북지北地 영주靈州 사람이며 진晉나라의 사예교위司隷校尉 부함傅咸의 7대손이다. 관직에 있을 때 항상 청렴하고 담박하였으며 조정에 있을 때 청탁하는 법이 없었다. 보통普通 5년(524)에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다.” 원사도袁司徒(
원찬袁粲)가
注+② ≪송서宋書≫ 〈원찬전袁粲傳〉에 말하였다. “원찬袁粲은 자字가 경천景倩이고 진군陳郡 양하陽夏 사람이며, 태위太尉 원숙袁淑의 형의 아들이다. 부친 원탁袁濯이 일찍 죽자 조모가 어려서 고아가 된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민손愍孫’이라 이름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었으며 청정淸整하고 풍조風操를 지녔다. 〈묘덕선생전妙德先生傳〉을 저술하여 자신을 빗대었으며 일찍이 을 사모하여 이름을 찬粲이라 바꾸고 자字를 이라 하였다. 제왕齊王(소도성蕭道成)의 공덕이 이미 막중하여 천명天命이 그에게 돌아갔는데, 원찬은 자신이 천자의 유조遺詔를 받았다는 이유로 두 성씨姓氏를 섬기려 하지 않아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집 문을 지날 때마다 탄식하며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