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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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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憑得罪注+① 唐書曰 “楊憑, 字虛受, 弘農人. 官湖南江西觀察使. 工文辭, 少負氣節, 與母弟凝․凌相友愛, 皆有時名. 重交遊, 尙然諾. 與穆質․許孟容․李鄘․王仲舒爲友, 稱‘楊穆許李之友’. 性簡傲, 不能接下, 人多怨之. 及歷二鎭, 尤事奢侈, 爲李夷簡所劾, 責授臨賀尉.”하니 姻友無敢送者어늘 獨徐晦 送至藍田注+② 唐書曰 “徐晦, 進士擢第, 登制科, 爲楊憑所薦. 及憑得罪, 交親無敢祖送, 獨晦送至藍田. 不數日, 御史中丞李夷簡請爲監察, 晦白夷簡曰 ‘生平不踐公門, 公何取而見獎拔?’ 夷簡曰 ‘聞君送楊臨賀, 不顧犯難, 肯負國乎?’ 由是知名.”하니 權載之謂徐하되
誠厚楊臨賀하니 無乃爲累乎
徐曰
晦自布衣時 楊知我厚하니 方玆流播 寧忍無言而别잇가 有如公爲姦佞譖斥이면 敢自同路人乎잇가하니
載之 歎其長厚注+③ 唐書曰 “權德輿, 字載之, 天水略陽人. 父皐, 天寶中, 祿山使之獻俘京師, 皐察祿山有異志, 詐死逃逸, 由是名聞天下. 德輿四歲能屬詩, 七歲居父喪, 以孝聞. 後以禮部尙書平章事, 自貞元至元和三十年間, 羽儀朝行. 直亮寬恕, 動作言語, 一無外飾, 蘊藉風流, 爲時稱嚮. 於述作特盛, 六經百氏, 游泳漸漬, 其文雅正而弘博, 王侯將相洎當時名人薨歿, 以銘記請者什八九, 時爲宗匠焉.”하다
【頭註】
李云 “夷簡甚通.”


2-21【양빙楊憑이 죄를 얻자注+① ≪구당서舊唐書≫ 〈양빙전楊憑傳〉에 말하였다. “양빙楊憑허수虛受이고 홍농弘農 사람이다. 관직이 호남강서관찰사湖南江西觀察使에 이르렀다. 문장을 잘 지었으며 젊어서부터 기개와 절조를 자부하였고 동모제同母弟양응楊凝양릉楊凌과 서로 우애가 있었으며 모두 당시에 명성이 있었다. 교유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약속을 존중하였다. 목질穆質허맹용許孟容이용李鄘왕중서王仲舒와 교유하여 ‘양목허리楊穆許李의 우정’이라고 일컬어졌다. 성품이 거만하여 아랫사람을 잘 대해주지 않아 그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남과 강서 두 진의 관찰사가 되자 더욱 사치를 일삼았으므로 이이간李夷簡의 탄핵을 받아 임하위臨賀尉로 좌천되었다.” 친척과 친구 중에 그를 전송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서회徐晦가 전송하러 남전藍田에 이르니注+② ≪구당서舊唐書≫ 〈서회전徐晦傳〉에 말하였다. “서회徐晦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제과制科에 오를 때 양빙의 추천을 받았다. 양빙이 죄를 얻자 교우와 친척들이 아무도 전송하지 않았는데 오직 서회가 전송하러 남전藍田에 이르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어사중승御使中丞 이이간李夷簡이 청하여 감찰監察로 삼았다. 서회가 이이간에게 ‘평소에 관공서의 문을 드나들지 않았는데 공께서 어찌 저를 취하여 발탁하셨습니까?’ 라고 묻자, 이이간이 말하였다. ‘그대가 양림하楊臨賀를 전송하여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나라를 저버리려 하겠는가.’ 이 일로 인해 이름이 알려졌다.” 권재지權載之(권덕여權德輿)가 서회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참으로 양림하楊臨賀(양빙楊憑)에게 돈독하게 하니 그대에게 피해가 없겠는가?”
서회가 말하였다.
“제가 벼슬하기 전부터 양빙이 저를 돈독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분이 이제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어찌 차마 말도 없이 작별하겠습니까. 만일 께서 간사한 이들의 참소를 받는다면 제가 길 가는 사람처럼 대하겠습니까?”
권재지가 그의 너그럽고 후덕함에 감탄하였다.注+③ ≪구당서舊唐書≫ 〈권덕여전權德輿傳〉에 말하였다. “권덕여權德輿재지載之이고 천수天水 약양略陽 사람이다. 부친 권고權皐천보天寶(742∼756)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그에게 경사京師에 포로를 바치게 하였을 때 안녹산이 반역의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죽은 것처럼 꾸며 달아났다. 이로 인해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다. 권덕여는 4세 때 시를 지을 수 있었고, 7세 때 부친상을 치르면서 효성스럽다고 이름이 났다. 후에 예부상서평장사禮部尙書平章事정원貞元(785∼805) 연간부터 원화元和(806∼820) 연간까지 30년간 조정 관원의 모범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관대하였고 행동거지와 언행에 조금도 겉치레가 없었으며 너그럽고 온화한 풍류를 지녀 당시에 칭송을 받았다. 문장을 짓는 데 특히 뛰어났는데 육경六經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하여 그의 문장은 아정雅正하면서도 포괄적이었으므로 왕후장상王侯將相이나 당시에 이름난 사람이 죽으면 명문銘文이나 기문記文를 청하는 사람이 열에 여덟아홉이었을 정도로 당대에 으뜸이었다.”
두주頭註
이지李贄이이간李夷簡은 매우 통달하였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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