殷荊州
의 有所識
이 作賦
하니 是
는 束晳慢戱之流
注+① 文士傳曰 “晳, 字廣微, 陽平元城人, 漢太子太傅踈廣後也. 王莽末, 廣曾孫孟達, 自東海避難元城, 改姓, 去踈之足, 以爲束氏. 晳博學多識, 問無不對. 康中, 有人自嵩高山下, 得竹簡一枚, 上兩行科斗書. 司空張華以問晳, 晳曰:‘此明帝顯節陵中策文也.’ 檢校果然. 曾爲〈䴵賦〉諸文, 文甚俳謔. 三十九歲卒, 元城爲之廢市.”라 殷
은 甚以爲有才
하여 語王恭
하되
便於手巾函中에 出之라 王讀할새 殷은 笑之不自勝이나 王看竟에 旣不笑하고 亦不言好惡하며 但以如意帖之而已하니 殷이 悵然自失이라
13-19
은형주殷荊州의 어떤 지인이
부賦를 지었는데, 이는
속석束晳처럼 장난스럽게 대충 지은 작품과 같은 부류였다.
注+① 장즐張騭의 ≪문사전文士傳≫에 말하였다. “속석束晳은 자字가 광미廣微로, 양평陽平 원성元城 사람이며, 한漢나라 태자태부太子太傅 소광踈廣의 후손이다. 왕망王莽 〈정권〉 말엽에 소광의 증손 소맹달踈孟達이 동해東海로부터 원성元城으로 피난하여 성姓을 바꾸었는데, ‘소踈’자에서 ‘주足’자를 제거하여 속束으로 성姓을 삼았다. 속석은 박학다식하여 질문마다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진晉 무제武帝〉 태강太康 연간(280~289)에 어떤 사람이 숭고산嵩高山 아래에서 한 쪽을 주웠는데, 그 위에 가 두 줄로 쓰여 있었다. 사공司空 가 이것을 가지고 속석에게 물었더니, 속석이 ‘이것은 한漢 명제明帝(유장劉莊)의 현절릉顯節陵 안에 있던 입니다.’ 하였다. 조사하여 살펴보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속석은〉 일찍이 〈병부䴵賦〉 등 여러 문장을 지었는데, 문장이 매우 해학적이다. 39세에 세상을 떠나자, 원성에서 그를 위해 시장의 상행위를 정지하였다.” 은형주는 〈그에게〉 재주가 있다고 확신하여
왕공王恭에게 말하였다.
“마침 새로운 문장을 보았는데 매우 볼 만합니다.”
〈은형주가〉 즉시
수건함手巾函에서 〈그 문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왕공이 읽는 동안 은형주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웃었는데, 왕공은 끝까지 보고 난 뒤에 웃지도 않고 역시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는 다만
로 눌러 놓았을 뿐이었으니, 은형주가 머쓱해하면서 실망했다.
注
◦ 유신옹劉辰翁:장난스럽게 대충 지은 작품에 딱 맞으니, 어찌 다시 말할 만하겠는가.
注
◦ 왕세무王世懋:그 상황을 〈직접〉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