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兄弟
는 龍躍雲津
이요 顧彦先
는 이라 謂
已盡
이어늘 不意復見褚生
이라하니
公
은 未覩不鳴不躍者耳
注+① 褚氏家傳曰 “陶, 字季雅, 吳郡錢塘人. 褚先生後也. 陶聦惠絶倫, 年十三作鷗鳥ㆍ水磑二賦. 宛陵嚴仲弼見而奇之曰 ‘褚先生復出矣.’ 弱不好弄, 淸淡閑黙. 以自娛,語所親曰 ‘聖賢備在中, 舍此何求?’ 州郡辟不就. 吳歸命, 世祖補臺郞ㆍ建忠校尉. 司空張華與陶書曰 ‘二陸龍躍於江漢, 彦先鳳鳴於朝陽. 自此以來, 常恐南金已盡, 而復得之於吾子. 故知之德不孤, 淵岱之寳不匱.’ 仕至中尉.”라하다
15-23 장화張華가 저도褚陶를 만나보고서 육평원陸平原(육기陸機)에게 말하였다.
“그대 형제는 은하에서 솟구치는 용龍이고, 고언선顧彦先(고영顧榮)은 산 동쪽을 향해 우는 봉황입니다. 동남東南지역의 보물은 이들에서 끝났다고 생각하였는데 생각지도 않게 다시 저생褚生(저도褚陶)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은 울지 않고 솟구치지 않는 자를 보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注+① 에 말하였다. “저도褚陶는 자字가 계아季雅이고, 오군吳郡 전당錢塘 사람이다. (저소손褚少孫)의 후손이다. 저도는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13세 때 〈구조부鷗鳥賦〉와 〈수애부水磑賦〉를 지었다. 완릉宛陵 사람 엄중필嚴仲弼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저선생이 다시 태어났다.’ 하였다. 몸이 약하여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깨끗하고 담박하며 진중하였다. 삼분三墳과 오전五典을 보며 스스로 즐겨 친한 이에게 말하기를, ‘성현聖賢이 책 속에 다 있으니 이것을 놔두고 어디서 찾겠는가?’라고 하였다. 주군州郡에서 초빙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오吳나라가 망하자 진晉 세조世祖(사마염司馬炎)가 대랑臺郞ㆍ건충교위建忠校尉에 보임하였다. 사공司空 장화張華가 저도褚陶에게 편지를 보내, ‘이륙二陸(육기陸機ㆍ육운陸雲)은 은하에서 솟구치는 용龍이고, 언선彦先(고영顧榮)은 산 동쪽을 향해 우는 봉황입니다. 이들 이후로 늘 이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주延州(오계찰吳季札)의 덕은 외롭지 않고 산천山川의 보물은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벼슬이 중위中尉에 이르렀다.”고영顧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