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전에
수춘壽春에 두 번 가서
마일제馬日磾를 보고
注+③ ≪삼보결록三輔決錄≫에 말하였다. “마일제馬日磾는 자字가 옹숙翁叔으로 마융馬融의 족손族孫이다. 한漢 헌제獻帝(유협劉協) 때의 대부大傅로서 채옹蔡邕․양사楊賜․당계전堂溪典과 함께 을 같이 교정하였다.” 중원中原의 사대부와 함께 만났을 때에, 〈그들은〉 우리 동방 사람들은 재주가 많지만 안타깝게도 학문이 넓지 못해
담론談論을 나눌 때에 따라오지 못하는 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 생각은 오히려 그렇지 않습니다. 경은 박학다식하기 때문에 전부터 경을
허도許都(
허창許昌)에 한번 보내 조정의 인사들과 교류하고 만나서 중원의 막말하는 자들을 꺾어버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경이 가기를 원치 않으면 바로
장자망張子網(
장굉張紘)에게 시키겠지만
注+④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장굉전張紘傳〉에 말하였다. “장굉張紘은 자字가 자강子綱이고 광릉廣陵 사람이다. 어려서 경사京師에서 유학하였다. 뒤에 강동江東에서 은거하고 있다가, 손책孫策이 왕조를 세우자 마침내 몸을 의탁하였다. 장소張昭와 더불어 함께 모의에 참여했는데, 〈손책은〉 항상 둘 중 한 사람은 남아서 지키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정벌에 나서도록 하였다.”
≪강표전江表傳≫에 말하였다. “손권孫權은 신하들과 있으면서 대부분 그들을 자字로 불렀는데, 오직 장소張昭를 ‘장공張公’으로, 장굉張紘을 ‘동부東部’라 불렀으니, 두 사람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자강이 그자들의 혀를 묶어버리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注+⑤ ≪오서吳書≫에 말하였다. “장굉張紘이 녹나무와 석류나무로 만든 베개를 보고는 그 무늬를 사랑하여 부賦를 지었다. 진림陳琳이 북쪽에 있을 때 그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나의 동향 사람인 장자강張子綱이 지은 것입니다.’ 뒤에 장굉이 진림이 지은 〈무고부武庫賦〉와 〈응기론應機論〉을 보고 진림에게 서신을 보내 크게 칭송하였다. 진림이 답장을 보내 ‘제가 하북河北에 있고부터 천하天下와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은 대체로 문장가가 적어서 걸출한 인물이 되기 쉽기 때문에 제가 이런 과분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경흥景興(왕랑王郞)이 이곳에 있고 그대와 자포子布(장소張昭)는 저쪽에 있으니, 이른바 「작은 무당이 큰 무당을 보자 신기神氣가 다한다.」는 격입니다.’라고 하였다.”우번虞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