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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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嵇中散 臨刑東市 神氣不變하고 索琴彈之하여 奏廣陵散이라 曲終
袁孝尼 嘗請學此散이어늘 吾靳固不與하니 廣陵散 於今絶矣注+① 晉陽秋曰 “初康與東平呂安親善, 安嫡兄遜, 淫安妻徐氏, 安欲告遜遣妻, 以咨於康, 康喩而抑之. 遜內不自安, 陰告安撾母, 表求徙邊. 安當徙, 訴自理, 辭引康.” 文士傳曰 “呂安罹事, 康詣獄以明之, 鍾會庭論康曰 ‘今皇道開明, 四海風靡, 邊鄙無詭隨之民, 街巷無異口之議, 而康上不臣天子, 下不事王侯, 輕時傲世, 不爲物用, 無益於今, 有敗於俗. 昔太公誅華士, 孔子戮少正卯, 以其負才亂群惑衆也. 今不誅康, 無以淸潔王道.’ 於是錄康閉獄. 臨死, 而兄弟親族, 咸與共別, 康顔色不變, 問其兄曰 ‘向以琴來不邪?’ 兄曰 ‘以來.’ 康取調之, 爲太平引, 曲成, 歎曰 ‘太平引, 於今絶也.’”로다하다
太學生三千人 上書하여 請以爲師한대 不許하고 文王 亦尋悔焉注+② 王隱晉書曰 “康之下獄, 太學生數千人請之. 于時豪俊皆隨康入獄, 悉解喩, 一時散遣, 康竟與安同誅.”注+③ 此速康之死也.하다


12-7 혜중산嵇中散(혜강嵇康)은 에서 처형에 임박했을 때 안색이 변치 않은 채 을 찾아 줄을 고르고는 을 연주하였다. 곡조가 끝나자 말하였다.
가 일찍이 이 곡조를 배울 것을 요청했는데, 내가 아까워하여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광릉산〉은 이제 〈그 전수가〉 끊어지는구나.”注+손성孫盛의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처음에 혜강嵇康동평東平 사람 과 매우 친밀하였다. 여안의 이 여안의 아내 서씨徐氏와 간통하자 여안은 여손을 고발하고 아내를 내칠 생각으로 혜강에게 물었더니, 혜강은 타이르면서 만류하였다. 여손은 내심 불안해하다가 여안이 모친을 때렸다고 밀고하면서 〈여안을〉 변방으로 유배 보낼 것을 요청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여안이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스스로를 변호했는데 공초供招에서 혜강을 끌어들였다.”
의 ≪문사전文士傳≫에 말하였다. “여안이 사건에 휘말렸을 때 혜강이 법정에 나아가 해명하자, 종회鍾會가 혜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하였다. ‘현재 황상皇上의 도리가 밝게 드러나 온 세상에 그 교화가 풍미하기 때문에 변방에도 시비를 불문한 채 함부로 남을 따르는 백성이 없고 거리에도 다른 의견을 내는 의론이 없습니다. 〈그런데〉 혜강은 위로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고 아래로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은 채 시속을 경시하고 세상 사람을 무시하여 필요한 쓰임이 되지 못하니, 지금 시대에 무익하고 풍속을 망칩니다. 옛날 은 그들이 자신의 재주를 믿고 군중을 미혹시켰기 때문입니다. 지금 혜강을 주벌하지 않으면 왕도王道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에 혜강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혜강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형제와 친족들이 모두 그와 이별했는데, 혜강은 안색도 변하지 않은 채 그 형(혜희嵇喜)에게 ‘지금 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하니, 그의 형이 ‘가지고 왔다.’ 하였다. 혜강은 을 취하여 줄을 고르고는 〈태평인太平引(광릉산廣陵散)〉을 연주하였다. 곡조가 끝나자, 탄식하며 ‘〈태평인〉이 이제 〈그 전수가〉 끊어지는구나.’ 하였다.”
태학생 3천 명이 상주하여 〈혜중산을〉 스승으로 삼기를 요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문왕文王(사마소司馬昭)도 역시 이후에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였다.注+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혜강嵇康이 하옥되자 태학생 수천 명이 〈그의 석방을〉 청원하였다. 그 당시 준걸과 영재들이 모두 혜강을 따라 감옥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혜강이 그들〉 모두에게 타이르자 동시에 돌아갔다. 혜강은 결국 여안呂安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注+③ 이 일이 혜강의 죽음을 앞당겼다.


역주
역주1 東市 : 漢나라 때 수도 長安의 동쪽 저잣거리로, 여기에서 사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이후에는 刑場을 가리키게 되었다.
역주2 廣陵散 : 琴曲의 이름이다. ‘散’은 操․弄․引과 같은 뜻으로, 곡조를 이른다. 魏(三國)나라 嵇康이 洛西에서 노닐다가 華陽亭에 묵으면서 琴을 타고 있을 때, 갑자기 어떤 나그네가 앞으로 나와 琴을 달라고 하더니 광릉산을 연주하여 들려주고는 남에게 그것을 전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晉書≫ 〈嵇康傳〉)
역주3 袁孝尼(袁準) : 陳郡 扶樂 사람으로, 字는 孝尼이다. 魏(三國)나라 郞中令 袁渙의 넷째 아들로, 위나라에서의 관직은 자세하지 않고, 진나라에서 給事中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儀禮喪服經≫注 1권, ≪袁子正論≫ 19권, ≪正書≫ 25권 등이 있다.
역주4 呂安 : ?~262. 兗州 東平 사람으로, 字는 仲悌, 어릴 때 이름은 阿都이다. 冀州牧 吕昭의 둘째 아들이자 吕巽의 이복동생이다.
역주5 嫡兄 : 庶子가 嫡室의 형을 부르는 호칭이다.
역주6 呂遜 : 兗州 東平 사람으로, 字는 長悌이고, 呂巽이라고도 한다. 司馬昭의 長史를 역임하였다.
역주7 張騭(장즐) : ≪晉書≫ 〈載記〉에 “晉 孝武帝 隆安 5년(401)에 房晷와 梁中庸을 左長史와 右長史로 삼았고, 張騭과 謝正禮를 左司馬와 右司馬로 삼았다.” 했는데, 余嘉錫은 ≪世說新語箋疏≫ 〈雅量〉에서 “장즐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裴松之와 劉孝標가 모두 그의 ≪문사전≫을 인용했으니 장즐은 晉代에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하였다.
역주8 庭論 : ‘庭’은 ‘廷’과 통하는 글자로, 조정에서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評議하는 것이다.
역주9 太公(呂尙)께서……주벌하시고 : ‘화사’는 오로지 文飾만 숭상하던 자로, ≪孔子家語≫ 〈始誅篇〉에 “姜太公이 화사의 목을 베었다.” 하였고, ≪論衡≫ 〈非韓篇〉에 “狂妄한 화사는 段干木의 부류인데, 강태공이 목을 베었다.” 하였다.
역주10 孔子께서……것 : ‘少正卯’는 春秋시대 魯나라의 대부로, ‘소정’은 複姓이라고도 하고 官名이라고도 하는데, 공자가 노나라의 司寇로 재직할 때에 政事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사형시켰다.(≪史記≫ 〈孔子世家〉)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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