嵇中散은 臨刑東市에 神氣不變하고 索琴彈之하여 奏廣陵散이라 曲終에 曰
袁孝尼
가 嘗請學此散
이어늘 吾靳固不與
하니 廣陵散
이 於今絶矣
注+① 晉陽秋曰 “初康與東平呂安親善, 安嫡兄遜, 淫安妻徐氏, 安欲告遜遣妻, 以咨於康, 康喩而抑之. 遜內不自安, 陰告安撾母, 表求徙邊. 安當徙, 訴自理, 辭引康.” 文士傳曰 “呂安罹事, 康詣獄以明之, 鍾會庭論康曰 ‘今皇道開明, 四海風靡, 邊鄙無詭隨之民, 街巷無異口之議, 而康上不臣天子, 下不事王侯, 輕時傲世, 不爲物用, 無益於今, 有敗於俗. 昔太公誅華士, 孔子戮少正卯, 以其負才亂群惑衆也. 今不誅康, 無以淸潔王道.’ 於是錄康閉獄. 臨死, 而兄弟親族, 咸與共別, 康顔色不變, 問其兄曰 ‘向以琴來不邪?’ 兄曰 ‘以來.’ 康取調之, 爲太平引, 曲成, 歎曰 ‘太平引, 於今絶也.’”로다하다
太學生三千人
이 上書
하여 請以爲師
한대 不許
하고 文王
도 亦尋悔焉
注+② 王隱晉書曰 “康之下獄, 太學生數千人請之. 于時豪俊皆隨康入獄, 悉解喩, 一時散遣, 康竟與安同誅.”注+③ 此速康之死也.하다
12-7
혜중산嵇中散(
혜강嵇康)은
에서 처형에 임박했을 때 안색이 변치 않은 채
금琴을 찾아 줄을 고르고는
을 연주하였다. 곡조가 끝나자 말하였다.
“
가 일찍이 이 곡조를 배울 것을 요청했는데, 내가 아까워하여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광릉산〉은 이제 〈그 전수가〉 끊어지는구나.”
注+① 손성孫盛의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처음에 혜강嵇康이 동평東平 사람 과 매우 친밀하였다. 여안의 인 이 여안의 아내 서씨徐氏와 간통하자 여안은 여손을 고발하고 아내를 내칠 생각으로 혜강에게 물었더니, 혜강은 타이르면서 만류하였다. 여손은 내심 불안해하다가 여안이 모친을 때렸다고 밀고하면서 〈여안을〉 변방으로 유배 보낼 것을 요청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여안이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스스로를 변호했는데 공초供招에서 혜강을 끌어들였다.”
의 ≪문사전文士傳≫에 말하였다. “여안이 사건에 휘말렸을 때 혜강이 법정에 나아가 해명하자, 종회鍾會가 혜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하였다. ‘현재 황상皇上의 도리가 밝게 드러나 온 세상에 그 교화가 풍미하기 때문에 변방에도 시비를 불문한 채 함부로 남을 따르는 백성이 없고 거리에도 다른 의견을 내는 의론이 없습니다. 〈그런데〉 혜강은 위로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고 아래로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은 채 시속을 경시하고 세상 사람을 무시하여 필요한 쓰임이 되지 못하니, 지금 시대에 무익하고 풍속을 망칩니다. 옛날 은 그들이 자신의 재주를 믿고 군중을 미혹시켰기 때문입니다. 지금 혜강을 주벌하지 않으면 왕도王道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에 혜강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혜강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형제와 친족들이 모두 그와 이별했는데, 혜강은 안색도 변하지 않은 채 그 형(혜희嵇喜)에게 ‘지금 금琴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하니, 그의 형이 ‘가지고 왔다.’ 하였다. 혜강은 금琴을 취하여 줄을 고르고는 〈태평인太平引(광릉산廣陵散)〉을 연주하였다. 곡조가 끝나자, 탄식하며 ‘〈태평인〉이 이제 〈그 전수가〉 끊어지는구나.’ 하였다.”
태학생 3천 명이 상주하여 〈혜중산을〉 스승으로 삼기를 요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진晉 문왕文王(
사마소司馬昭)도 역시 이후에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였다.
注+②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혜강嵇康이 하옥되자 태학생 수천 명이 〈그의 석방을〉 청원하였다. 그 당시 준걸과 영재들이 모두 혜강을 따라 감옥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혜강이 그들〉 모두에게 타이르자 동시에 돌아갔다. 혜강은 결국 여안呂安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注+③ 이 일이 혜강의 죽음을 앞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