桓公
이 伏甲設饌
하고 廣延朝士
하니 因此
하여 欲誅謝安
과 王坦之
注+① 晉安帝紀曰 “簡文晏駕, 遺詔桓溫, 依諸葛亮․王導故事, 溫大怒, 以爲黜其權, 謝安․王坦之所建也. 入赴山陵, 百官拜于道側, 在位望者, 戰慄失色. 或云 ‘自此欲殺王․謝.’”라 王
이 甚遽
하여 問謝曰
相與俱前
에 王之恐狀
은 轉見於色
하고 謝之寬容
은 愈表於貌
라 望階趨席
에 方作洛生詠
하여 諷浩浩洪流
하니 桓
이 憚其曠遠
하여 乃趣解兵
注+② 按宋明帝文章志曰 “安能作洛下書生詠, 而少有鼻疾, 語音濁. 後名流多斅其詠, 弗能及, 手掩鼻而吟焉. 桓溫止新亭, 大陳兵衛, 呼安及坦之, 欲於坐害之. 王入失厝, 倒執手版, 汗流霑衣. 安神姿擧動, 不異於常, 擧目徧歷溫左右衛士, 謂溫曰 ‘安聞諸侯有道, 守在四鄰, 明公何有壁間著阿堵輩?’ 溫笑曰 ‘正自不能不爾.’ 於是矜莊之心頓盡, 命部左右, 促燕行觴, 笑語移日.”이라 王
과 謝
는 舊齊名
이러니 於此
에 始判優劣
이라
13-6
환공桓公(
환온桓溫)이 병사를 매복시켜 놓고 잔치를 베풀고는 널리 조정의 인사를 초청했으니, 이를 기회로
사안謝安과
왕탄지王坦之를
注+① 왕소지王韶之의 ≪진안제기晉安帝紀≫에 말하였다. “간문제簡文帝(사마욱司馬昱)가 붕어할 때 환온桓溫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를 따르라고 하자, 환온이 크게 분노했는데 이는 자신의 권력을 추락시킨 것은 사안謝安과 왕탄지王坦之가 건의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환온이〉 산릉山陵(국장國葬)에 참석하려고 입조入朝할 때에 백관이 길 옆에서 절을 했는데, 지위와 명성이 있는 사람들은 벌벌 떨면서 아연실색했다. 혹자는 이때부터 〈환온이〉 왕탄지와 사안을 죽이고자 했다고 하였다.” 주살하려고 했다. 왕탄지가 매우 다급해하면서 사안에게 물었다.
사안은 마음의 변화 없이 왕문도王文度(왕탄지)에게 말하였다.
“진晉나라 조정의 존망이 이 한 번의 행동에 달려 있소.”
〈사안과 왕탄지가〉 함께 나아갔는데, 왕탄지의 두려워하는 모습은 안색에 더욱 잘 드러났고, 사안의 침착한 태도는 모습에 더욱 잘 나타났다. 〈사안이〉 계단을 바라보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에 나아가면서
으로 “
”라고 노래하자, 환공이 그의 〈마음이〉 광대한 것을 존경하여 즉시 서둘러 병사를 해산시켰다.
注+② 살펴보건대, 남조南朝 송宋 명제明帝(유욱劉彧)의 ≪진강좌문장지晉江左文章志≫에 말하였다. “사안은 낙양 서생의 창법에 뛰어났는데, 어려서 비질鼻疾이 있어 그 음색이 탁하였다. 이후에 명사들이 대부분 그의 읊조림을 흉내 냈지만 〈그의 수준에〉 이를 수 없자 손으로 코를 쥐고 읊었다. 환온이 에 머물 때, 호위병을 대대적으로 배치하고는 사안과 왕탄지를 불렀으니, 자리에서 그들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왕탄지는 들어갈 때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몰라 수판手版(홀笏)을 거꾸로 들었고, 땀이 흘러 옷을 적셨다. 사안은 마음과 모습과 행동거지가 평상시와 다르지 않은 채 눈을 들어 환온 좌우의 호위병을 두루 훑어보고는 환온에게 ‘제가 듣건대, 고 했으니, 명공明公께서는 어찌 벽 사이에 무리를 두었습니까?’ 하자, 환온이 웃으면서 ‘정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오.’ 하였다. 이에 〈환온은〉 엄숙한 마음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좌우의 부대에게 명하여 술자리를 재촉하고 술잔을 돌리며 오랜 시간 웃으며 담소하였다.” 왕탄지와 사안은 예전부터 명성이 나란했는데, 이 일로써 비로소 우열을 가리게 되었다.
注
◦ 유진옹劉辰翁:환온桓溫은 본래 재주와 덕성이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