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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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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南郡楊廣 共說殷荊州하되 宜奪殷覬南蠻하여 以自樹注+① 桓玄別傳曰 “玄, 字敬道, 譙國龍亢人, 大司馬溫少子也. 幼童中, 溫甚愛之, 命以爲嗣, 年七歲襲封南郡公. 拜太子洗馬․義興太守, 不得志, 少時去職, 歸其國. 與荊州刺史殷仲堪素舊, 情好甚隆.” 周祗隆安記曰 “廣, 字德度, 弘農人, 楊震後也.” 晉安帝紀曰 “覬, 字伯道, 陳郡人. 由中書郎, 出爲南蠻校尉. 覬亦以率易才悟著稱, 與從弟仲堪俱知名.” 中興書曰 “初, 仲堪欲起兵, 密邀覬, 覬不同. 楊廣與弟佺期勸殺覬, 仲堪不許.”라하다 亦卽曉其旨하여 嘗因行散이라가 率爾去下舍하여 便不復還하다 內外無預知者 意色蕭然하고 遠同鬪生之無慍하니 時論以此多之注+② 春秋傳曰 “楚令尹子文, 鬪氏也.” 論語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하다
【頭註】
劉云 “如此去官, 亦大善.”


1-50 처음에 환남군桓南郡(환현桓玄)과 양광楊廣은형주殷荊州(은중감殷仲堪)에게 함께 설득하기를, 은기殷覬남만교위南蠻校尉 자리를 빼앗아 자신들의 세력을 심어야 한다고 하였다.注+① 〈환현별전桓玄別傳〉에 말하였다. “환현桓玄경도敬道이고 초국譙國 용항龍亢 사람이며, 대사마 환온桓溫의 작은 아들이다. 어린 자식들 중에 환온이 그를 매우 사랑하여 후계로 삼으라고 명하여 7세 때 남군공南郡公을 물려받았다. 태자세마太子洗馬의흥태수義興太守에 임명되었으나 뜻을 얻지 못하여 젊었을 때 관직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형주자사荊州刺史 은중감殷仲堪과 평소 친하게 지내 우호가 매우 돈독하였다.”
에 “양광楊廣덕도德度이고 홍농弘農 사람이다. 양진楊震의 후손이다.” 하였다.
진안제기晉安帝紀≫에 말하였다. “은기殷覬백도伯道이고 진군陳郡 사람이다. 중서랑中書郎을 거쳤고 외직으로 나가 남만교위南蠻校尉가 되었다. 은기 역시 솔직하고 재기가 뛰어난 것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종제從弟은중감殷仲堪과 함께 모두 이름이 알려졌다.”
중흥서中興書≫에 말하였다. “처음에 은중감이 군사를 일으키려 할 때 몰래 은기를 불렀으나 은기가 동조하지 않았다. 양광楊廣과 아우 양전기楊佺期가 은기를 죽이라고 권하였으나 은중감이 허락하지 않았다.”
은기 역시 곧 그 뜻을 알아채고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안팎에서 이러한 사정을 미리 안 자가 없었으나, 은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먼 옛날 투생鬪生(영윤자문令尹子文)이 화내지 않았던 것처럼 처신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그를 칭찬하였다.注+②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라의 영윤자문令尹子文(투누오도鬪穀於菟)은 투씨鬪氏이다.”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영윤자문令尹子文은 세 번 영윤令尹이 되었으나 기뻐하는 낯빛이 없었고, 세 번 파직되었으나 화내는 기색이 없었다.” 하였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이와 같이 관직을 떠나는 것 역시 매우 좋다.


역주
역주1 周祗의 ≪隆安記≫ : 周祗는 字는 颖文이고 陳郡 사람이다. 東晉 義熙(405~418) 초에 國子博士였고 문집 20권이 있었다. 隆安은 동진 安帝 때의 연호(397~405)이므로, 이 책은 이 시기에 관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역주2 약을……나갔다가 : 여기서 藥은 晉나라 名士들이 복용하던 寒食散 또는 일명 八石散이라고 하는 일종의 마약이다. 그 약을 복용한 후 散步하러 나가는 것을 ‘行散’이라고 하였다.(≪世說新語補觿≫)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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