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처음에
환남군桓南郡(
환현桓玄)과
양광楊廣이
은형주殷荊州(
은중감殷仲堪)에게 함께 설득하기를,
은기殷覬의
남만교위南蠻校尉 자리를 빼앗아 자신들의 세력을 심어야 한다고 하였다.
注+① 〈환현별전桓玄別傳〉에 말하였다. “환현桓玄은 자字가 경도敬道이고 초국譙國 용항龍亢 사람이며, 대사마 환온桓溫의 작은 아들이다. 어린 자식들 중에 환온이 그를 매우 사랑하여 후계로 삼으라고 명하여 7세 때 남군공南郡公을 물려받았다. 태자세마太子洗馬․의흥태수義興太守에 임명되었으나 뜻을 얻지 못하여 젊었을 때 관직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형주자사荊州刺史 은중감殷仲堪과 평소 친하게 지내 우호가 매우 돈독하였다.”
에 “양광楊廣은 자字가 덕도德度이고 홍농弘農 사람이다. 양진楊震의 후손이다.” 하였다.
≪진안제기晉安帝紀≫에 말하였다. “은기殷覬는 자字가 백도伯道이고 진군陳郡 사람이다. 중서랑中書郎을 거쳤고 외직으로 나가 남만교위南蠻校尉가 되었다. 은기 역시 솔직하고 재기가 뛰어난 것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종제從弟인 은중감殷仲堪과 함께 모두 이름이 알려졌다.”
≪중흥서中興書≫에 말하였다. “처음에 은중감이 군사를 일으키려 할 때 몰래 은기를 불렀으나 은기가 동조하지 않았다. 양광楊廣과 아우 양전기楊佺期가 은기를 죽이라고 권하였으나 은중감이 허락하지 않았다.” 은기 역시 곧 그 뜻을 알아채고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안팎에서 이러한 사정을 미리 안 자가 없었으나, 은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먼 옛날
투생鬪生(
영윤자문令尹子文)이 화내지 않았던 것처럼 처신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그를 칭찬하였다.
注+②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초楚나라의 영윤자문令尹子文(투누오도鬪穀於菟)은 투씨鬪氏이다.”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영윤자문令尹子文은 세 번 영윤令尹이 되었으나 기뻐하는 낯빛이 없었고, 세 번 파직되었으나 화내는 기색이 없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