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仲回
는 姿性方潔
하여 疾惡疆豪
注+① 范曄後漢書曰 “王丹, 字仲回, 京兆下邽人. 哀ㆍ平間, 仕州․郡, 王莽時, 連徵不至, 鄧禹至關中, 表爲左馮翊, 稱疾免歸, 後復徵爲太子少傳.”라 一友人
이 喪親
한대 同郡陳遵
이 關西大俠
으로 爲護喪事
에 賻助甚豐
이라 仲回懷一縑
하여 陳於主人前
하고 曰
遵有慚色
注+② 班固漢書曰 “陳遵, 字孟公, 杜陵人. 長八尺餘, 容貌甚偉, 略涉傳記, 贍於文辭. 請求, 不敢逆, 所到, 衣冠懷之. 時列侯有與遵同姓氏者, 每至人門曰 ‘陳孟公’, 坐中皆震動, 旣至而非, 因號其人, 曰陳驚坐云.”하다
10-4 【
보補】
왕중회王仲回(
왕단王丹)는 몸가짐이 바르고 성품이 개결하여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구는 자를 미워하였다.
注+①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왕단열전王丹列傳〉에 말하였다. “왕단은 자字가 중회仲回로, 경조京兆 하규下邽 사람이다.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시대에 주州와 군郡에서 벼슬하였고, 왕망王莽 시대에 연달아 〈조정으로〉 초빙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가 관중關中에 이르렀을 때, 표문表文을 올려 〈그에게〉 좌풍익左馮翊 지역을 다스리게 했으나 병을 핑계 대고 〈일을 처리하지 않자〉 면직되어 돌아갔다. 이후에 다시 〈조정에 초빙되어〉 태자소전太子少傳가 되었다.” 어떤 벗이
친상親喪을 당했을 때,
관서關西 지역의
대협大俠으로서 같은
군郡 출신의
진준陳遵이 그 벗을 위해 상례를 도왔는데,
왕중회는 ‘옅은 황색의 고운 합사 비단[
겸縑]’ 한 필을 품고 와서 주인 앞에 내놓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가져온 이 비단은 〈나의 아내가 직접〉 베틀에서 짠 것이네.”
진준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
注+②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준전陳遵傳〉에 말하였다. “진준은 자字가 맹공孟公으로, 두릉杜陵 사람이다. 신장이 8척 남짓이고 용모가 매우 훤칠하며, 옛날 기록을 대략 섭렵하고 문장이 풍부하였다. 요청을 받으면 감히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의관衣冠(사대부)이 그를 좋아하였다. 당시 가운데 진준과 성씨와 〈자字가〉 같은 자가 있었는데, 그가 매번 남의 집 문에 이르러 ‘진맹공이오.’라고 하면 번번이 좌중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지만, 〈집 안에〉 이른 뒤에 〈보면 진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진경좌陳驚坐라고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