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驃騎
가 亡後
注+① 何充別見.에 徵褚公入
하니 既至石頭
에 王長史
注+② 王長史別傳曰 “濛, 字仲祖, 太原晉陽人. 其先出自周室, 經漢․魏, 世爲大族. 祖, 北軍中, 父訥, 葉令. 濛神氣淸韶, 年十餘歲, 放邁不群. 弱冠檢尙, 風流雅正, 外絶榮競, 內寡私欲. 辟司徒掾․中書郞. 以后父, 贈光祿大夫.”와 劉尹
이 同詣褚
라 褚曰
國自有周公
注+③ 晉陽秋曰 “充之卒, 議者謂太后父裒宜秉朝政. 裒自丹徒入朝, 吏部尙書劉遐勸裒曰 ‘會稽王令德, 國之周公也, 足下宜以大政付之.’ 裒長史王胡之亦勸歸藩. 於是固辭歸.”이라하다
4-35
하표기何驃騎(
하충何充)가 죽은 뒤에
注+① 하충何充은 따로 보인다. 〈조정에서〉
저공褚公(
저부褚裒)을 들어오라고 불렀다. 〈저공이〉
석두石頭에 이르렀을 때에
왕장사王長史(
왕몽王濛)와
注+② 〈왕장사별전王長史別傳〉에 말하였다. “왕몽王濛은 자字가 중조仲祖이고 태원太原 진양晉陽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주周나라 왕실에서 나왔으며,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를 거치는 동안 대대로 명문거족이었다. 조부 왕우王佑는 북군중후北軍中候였고 부친 왕눌王訥은 엽현령葉縣令이었다. 왕몽은 정신과 기운이 맑고 아름다웠으며, 나이 10여세에 호방하고 초탈한 것이 평범하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품행이 고상하고 풍류가 아정雅正하여 밖으로는 명예를 탐하지 않고 안으로는 사욕이 없었다. 사도연司徒掾과 중서랑中書郞에 초빙되었다. 황후(동진東晉 애제哀帝의 정황후靖皇后)의 부친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유윤劉尹(
유담劉惔)이 함께 저공을 찾아갔다. 저공이 말했다.
주공周公
“유진장劉真長(유담)은 어떻게 나를 대우하시겠습니까?”
저공이 그리하여 왕장사 쪽을 보니 왕장사가 말했다.
“나라에 자연히
주공周公 같은 분이 있습니다.”
注+③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왕충王充이 죽자 논의하던 자들이 태후太后(동진東晉 강제康帝의 강헌황후康獻皇后)의 부친 저부褚裒가 국정을 맡아야 한다고 하였다. 저부가 단도丹徒에서 조정으로 들어오자, 이부상서吏部尙書 유하劉遐가 저부에게 ‘회계왕會稽王(진晉 간문제簡文帝 사마욱司馬昱)은 덕이 훌륭한 분으로 국가의 주공周公과 같은 분입니다. 족하足下께서는 정사를 그분께 맡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권고하였고, 저부의 장사長史인 왕호지王胡之도 번진蕃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저부가 이에 극구 사양하고 번진으로 돌아갔다.”
注
◦ 유응등劉應登:의당 회계왕會稽王에게 넘겨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