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고 품평했었다.注+① 고사손高似孫의 ≪자략子略≫에 말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3천 글자는 표현이 간결하고 뜻이 심오하여 고요히 육경六經을 넘어서며 그 쓰임이 간이하다. 장주莊周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깨끗하고 침잠하여 현묘玄妙한 경지에 있어서는 노자老子와 같지만, 〈그의〉 의경意境은 깊고 높으며 쓸쓸하여 노자의 경계를 넘어 그 바깥에서 노닐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말과 뜻은 티끌 하나 없이 비범하고 탁월하며 답습하고 추종하는 누추함이 조금도 없다. 천지의 끝을 탐구하고 인간의 거짓을 궁구하여 거침없이 펼쳤으니, 마치 장강長江과 황하黃河가 굽이치며 쏟아내려 천하에 넘치는 것 같았다. 또 마치 세상만물의 모든 소리가 노한 듯 울부짖으며 맞부딪쳐 솟구치다가 소리는 가라앉고 그림자는 사라져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대체로 황당하고 괴이하며 분방하고 허황되어서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어지러이 홀로 외쳤지만, 법도法度가 삼엄森嚴하고 문사文辭가 뛰어나고 굳세어 스스로 아름답고 새로운 경지를 이루었으니, 또한 한 시대의 기재奇才이다! 전국戰國시대에 기사奇士가 많았으니, 순경荀卿(순자荀子)의 학문은 이 〈현실〉 세상에 뜻을 둔 경우이고, 노련魯連(노중련魯仲連)의 논변論辯은 홀로 자신의 몸을 선善하게 닦는 경우이다. 한 권의 우언寓言인 ≪장자莊子≫는 도道에 깊지 않은 사람은 쉽사리 이 책의 경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골계滑稽(익살)만으로 도道를 밝혔으니, 선비가 재주를 쓸 데가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세속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경우라도 〈이 책을〉 염두에 두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 천하가 크게 무너져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쳤으니, 〈세상 어디서나〉 약탈과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완전히 같았다. 그의 생각으로는 격려하고 되돌리고 바로잡고 안정시킬 수 있다고 여겼고, 거리낌 없이 마음껏 말을 쏟아내 세상의 사사로움을 바로잡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천하를 어지럽게 한 잘못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가운데 공자孔子를 가탁하여 스스로 잘못을 초래한 경우가 29장章이 있고, 또 요堯임금, 우禹임금, 문왕文王, 강태공姜太公의 일을 말한 것은 모두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보이지 않는데도 근거 없는 주장을 멋대로 하였으니, 성인을 업신여기고 도道를 모독함이 이에 또한 심해졌다.”注+② 두엄杜淹이 지은 ≪문중자세가文中子世家≫에 말했다. “문중자文中子왕씨王氏는 휘諱가 통通이고 자字가 중엄仲淹이다. 6대조六代祖왕현王玄은 유송劉宋의 큰 유학자로 강좌江左(강남江南) 지역에서는 그를 왕선생王先生이라고 불렀으며, 그에게 도를 전수받은 사람을 ‘왕선생업王先生業’이라고 하였다. 문중자의 부친은 동천부군銅川府君왕륭王隆으로 선생의 학문을 전수해 문인門人 천 여 명을 가르쳤다. 개황開皇 4년(584) 문중자가 태어나자 동천부군이 점을 쳤는데 〈동천부군이〉 ‘〈이는〉
의 괘卦이다. 어찌하여 〈이 괘가〉 나왔을까. 지이地二[음효陰爻]가 천일天一[양효陽爻]이 되고 지극한 덕德을 지녔으면서도 아래의 자리에 있으니, 능히 많은 이들을 바르게 할 수 있으면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군왕의 덕은 있지만 〈뜻을 이룰 수 있는〉 때는 아닐 것이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천하 사람들의 뜻을 〈군왕에게〉 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름을 ‘통通’으로 지었다. 〈왕통은〉 관례를 치르고 나서 〈세태를〉 개탄하며 창생蒼生들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수隋문제文帝(양견楊堅)를 알현하고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상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동정가東征歌〉를 짓고 귀향하였다. 뒤에 재차 부름을 받았으나 가지 않았다. 친한 이들에게 ‘나의 고조부께서 하분河汾에 처음 집을 마련하셨고 산소를 쓴 지 이제 4대째가 되었습니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이 있는데 띠로 만든 처마에 흙 계단은 손바닥 만합니다.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있는데 어디를 가려 하겠습니까. 물러나 도를 지향할 따름입니다.’라고 하고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내용을 보태고 ≪예기禮記≫와 ≪악기樂記≫를 바로잡으며 ≪원경元經≫을 짓고 ≪역경易經≫의 도道를 밝히니, 9년 만에 육경六經이 크게 이루어졌다. 문인門人이 먼 곳에서 와서 모두 북쪽을 바라보며 〈스승으로 모시고〉 군왕을 보좌하는 도리를 배웠다. 대업大業 13년(617) 병이 위독해지자 문인들에게 ‘내 꿈에 안회顔回께서 공자孔子의 명이라고 하면서 「돌아가서 쉬자.」라고 하셨다. 아마도 부자夫子께서 나를 부르시는가보다.’라고 하였다. 병으로 누운 지 이레 만에 운명하였다. 문인들이 시호를 ‘문중자文中子’라고 했다. 그 저서를 모두 순서에 따라 편집하여 왕씨王氏들에게 돌려주었으니, ≪예론禮論≫ 25편, ≪악론樂論≫ 20편, ≪속서續書≫ 150편, ≪속시續詩≫ 360편, ≪원경元經≫ 50편, ≪찬역贊易≫ 70편으로 모두 나열하면 80권이 된다.”
“왕중엄王仲淹은 〈공자보다〉 백세百世 뒤에 태어나 옛 성현의 책을 읽어 그 쓰임을 거칠게나마 알았다. 그렇지만 그 근본을 깊이 탐구하고 그 실질에 힘을 다한 적이 없었다. 명예를 좋아하고 빨리 이루려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책을 지어 이론을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는 데 급급하였다. 자신의 몸을 의탁할 곳이 없는 상황이 되자 양한兩漢 이래의 볼품없는 문자文字와 언어言語, 그리고 시시한 공명功名과 사업事業을 주워 모으고, 자신의 타고난 자질과 어쩌다 들어맞는 것과 엇비슷한 것을 찾아서 육경六經을 모방해 차례를 매기고 편집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그 안에 나오는〉 인물을 끌어와
의 반열에 억지로 추어올렸다. 지금 ≪중설中說≫을 살펴보고 그 규모의 대략을 파악하였다. 저 ≪찬역贊易≫으로 어찌 충분히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서로 본질과 작용(용用)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한나라〉 고조高祖(유방劉邦), 문제文帝(유항劉恒), 무제武帝(유철劉徹), 선제宣帝(유순劉詢)의 제도가 어찌
을 전수한 것이겠는가. 조조曹操, 유정劉楨, 안연지顔延之, 사영운謝靈運의 시가 어찌 ‘모든 사물에는 변하지 않는 도리가 있다.’는 가르침이겠는가. 숙손통叔孫通, 공손술公孫述, 조포曹褒, 순욱荀勖의 예악禮樂 중에서 또 어느 것이 백이伯夷, 후기后䕫, 주공周公의 훌륭함과 함께 하는가. 유송劉宋과 북위北魏 이래로 천하의 중심이 한번은 남쪽에 있었고 한번은 북쪽에 있기에 이르렀다. 그 공로와 도덕을 비교하고 헤아려보건대 〈진정한〉 임금이나 신하가 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렇다면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향배, 황실의 혈통과 계승의 치우침과 공정함 역시 어찌 논하기에 충분하겠는가. 그런데 그 문제와 관련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정통을〉 저기에서 빼앗아 여기에 주어 공자의 ≪춘추春秋≫에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말인가. 아마도 이는 자신의 학문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수준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모른 상태에서 양한兩漢의 군주가 삼왕三王과 같은 군주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모른채 혼자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을 가지고 모양만 엇비슷한 수준으로 흉내내고는 오만하게 스스로는 전대의 훌륭한 임금을 계승하여 후세의 왕들에게 이어줄 만하다고 여겼을 것이나, 바로 이 때문에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주제넘게 〈스스로를〉 왕王이라고 칭한 것과 같은 죄에 자신이 빠졌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후세의 도를 아는 군자가 비록 그의 말을 취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끝내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장주莊周
왕통王通
注
【두주頭註】
◦ 이지李贄:주자朱子가 자기 이야기를 하였다.
注
◦ 이지李贄: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으니, 〈주자가〉 왕통王通 뒤에 있음을 알겠다.
역주
역주1張儀와 蘇秦 :
소진과 장의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遊說客이다. 장의는 秦나라를 섬기자는 連橫說을 주장했고, 소진은 6국이 연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合縱說을 주장하였다.
역주2王莽 :
漢나라 외척 출신으로 前漢 말기 平帝가 죽은 뒤 대리하여 집권하다가 국호를 新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는데 15년을 채우지 못하고 망하였다. 왕씨 집안은 황실의 외척으로 부귀와 위세가 대단했는데, 왕망만 유독 소박한 생활을 하고 사람됨이 겸손했으며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論語≫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