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葛靚이 後入晉하니 除大司馬召나 不起하고 以與晉室有讎라하여 常背洛水而坐라 與武帝有舊라 帝欲見之나 而無由하니 乃請諸葛妃呼靚이라 旣來에 帝就太妃間하여 相見할새 禮畢하고 酒酣에 帝曰
因涕泗百行
하니 帝於是慚悔而出
注+① 晉諸公贊曰 “靚, 字仲思, 瑯琊人, 司空誕少子也. 雅正有才望, 仕吳, 爲右將軍․大司馬. 吳亡, 靚入洛, 以父誕爲太祖所殺, 誓不見世祖. 世祖叔母瑯琊王妃, 靚之姊也. 帝後因靚在姊間, 往就見焉, 靚逃於厠中. 於是以至孝發名. 時嵇康亦被法, 而康子紹死蕩陰之役. 談者咸曰 ‘觀紹․靚二人, 然後知忠孝之道, 區以別矣.’”하다
10-13
제갈정諸葛靚이 〈
오吳(
삼국三國)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진晉나라에 들어갔을 때, 〈진나라 조정에서〉
대사마大司馬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진나라 왕실과는 원수 관계라고 여겼기 때문에 항상
낙수洛水를 등지고 앉았다.
진晉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와 옛 우정이 있었던 터라 무제가 그를 만나고자 했으나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무제는〉
에게 제갈정을 불러달라고 요청하였다. 〈제갈정이 제갈비의 처소에〉 도착한 뒤에 무제가
태비太妃(제갈비)의 처소에 가서 그를 만났다. 상견례가 끝나고 술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 무제가 말하였다.
“그대는 아직도 죽마竹馬를 타고 놀았을 때의 우정을 기억하고 있소?”
“신은 〈복수하기 위해〉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 다시 성상의 용안을 뵙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자, 무제가 이에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면서 〈제갈비의 처소를〉 나갔다.
注+① 부창傅暢의 ≪진제공서찬晉諸公敍贊≫에 말하였다. “제갈정諸葛靚은 자字가 중사仲思로, 낭야瑯琊 사람이며, 사공司空 제갈탄諸葛誕의 막내아들이다. 우아하고 바르며 재능과 명망이 있었다. 오吳(삼국三國)나라에서 벼슬하여 우장군右將軍과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오나라가 멸망한 뒤에 제갈정은 낙양洛陽으로 들어갔는데, 부친 제갈탄이 태조太祖(사마소司馬昭)에게 피살되었다는 이유로 세조世祖(사마소의 아들 사마염司馬炎)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세조의 숙모인 낭야왕瑯琊王 〈사마주司馬伷의〉 비妃는 제갈정의 누이였다. 무제武帝(사마염)는 이후에 제갈정이 〈그의〉 누이에 처소에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만나러 갔는데, 제갈정은 변소 안으로 도망쳤다. 이에 극진한 효성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에 도 처형되었는데, 논자들은 모두 ‘혜소와 제갈정 두 사람을 살펴본 이후에야 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