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汧公은 少貧하여 客游梁宋이라가 與諸生共逆旅한대 諸生病且死에 出白金하여 語公曰
左右無知者하니 幸君以此葬我하고 餘則君自取之하라하다
公許之託葬
하고 密置餘金棺下
하다 後
에 其家來謁
하니 共啓墓
하여 出金付之
注+① 劉昫唐書曰 “李勉, 字玄卿, 鄭王元懿曾孫. 幼勤經史, 長而沉雅淸峻. 德宗朝以司徒平章事, 一日上謂勉曰 ‘衆人皆言盧杞姦邪, 朕何不知.’ 對曰 ‘天下皆知其姦邪, 獨陛下不知, 所以爲姦邪也.’ 時人多其正直. 勉坦率素淡, 好古尙奇, 清廉簡易, 爲宗臣之表. 善鼓琴, 好屬詩. 在相位三十年, 祿俸皆遺親黨, 身沒無私積. 其在天官, 禮賢下士. 以李巡․張參爲判官, 卒於幕, 三歲之內, 每遇宴飲, 必設虚位於筵次, 陳膳執酹, 辭色悽惻, 論者美之.”하다
注
王云 “李約是汧公子, 途遇賈胡事尤奇, 可謂世有盛德.”
2-18【
보補】
이견공李汧公(
이면李勉)이 젊어서 가난하여
지역을 떠돌다가 어떤
제생諸生(
유생儒生)과 여관에 같이 묵게 되었다. 제생이 병들어 죽게 되자
백금白金을 꺼내 공에게 말하였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이것으로 나를 장사 지내고 남은 것은 가지기 바라오.”
공이 장례를 맡아주기로 허락하고 남은 금을 몰래 관 아래에 두었다. 나중에 그의 집안사람이 찾아오자 함께 묘를 열어 금을 꺼내 돌려주었다.
注+① 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 〈이면전李勉傳〉에 말하였다. “이면李勉은 자字가 현경玄卿이고 정왕鄭王 이원의李元懿(당唐 고조高祖의 열셋째 아들)의 증손이다. 어려서는 경사經史를 부지런히 익혔고 성장하여서는 침착하고 단아하며 맑고 준엄하였다. 덕종德宗(이괄李适) 때 사도평장사司徒平章事를 지냈는데, 어느 날 임금이 이면에게 ‘사람들이 모두 노기盧杞를 간사하다고 하는데 짐은 어찌 알지 못하는가?’ 하니, 이면이 대답하였다. ‘천하가 모두 그가 간사하다는 것을 아는데 폐하만이 알지 못하는 것이 그가 간사하다는 이유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정직함을 칭찬하였다. 이면은 솔직하고 담박하였으며 옛 것을 좋아하고 기이함을 숭상하였으며 청렴하고 대범하여 종신宗臣의 표상이 되었다. 가야금을 잘 탔고 시 짓기를 좋아하였다. 재상 자리에 30년간 있었는데 녹봉을 친척들에게 주어 죽은 뒤에 개인 재산이 없었다. 그가 이부吏部의 관리[천관天官]로 있을 때는 현사賢士를 예우하고 겸손하게 대하였다. 이순李巡과 장삼張參을 판관判官으로 삼았는데 자신의 막하에서 그들이 죽자 3년간 연회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연회석에 빈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차려놓고 술잔을 잡으며 말과 낯빛이 처연하니 논하는 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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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무王世懋:
이 더욱 기이하니, 대대로 훌륭한 덕을 지녔다고 이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