范巨卿
이 爲荆州刺史
注+① 謝承後漢書曰 “范式, 字巨卿, 一名汜, 山陽金鄕人.”에 友人孔仲山
이 家貧奉親
하여 變姓名
하여 傭爲新野縣街卒
注+② 范曄後漢書曰 “孔嵩, 字仲山, 南陽新野人. 爲阿里街卒, 正身厲行, 街中子弟皆服其訓. 辟公府, 之京師, 道宿下亭, 盜共竊其馬. 尋問知嵩, 乃相責讓曰 ‘孔仲山善士, 豈宜侵盜?’ 送馬謝之.”이라 値巨卿行部
에 縣選仲山爲導騎
한대 巨卿見仲山
하고 驚捉臂曰
子非孔仲山邪아 吾昔與子로 俱曳長裾하고 遊息太學한대 吾蒙國恩하여 致位牧伯이어늘 而子懐道隱身하여 處於卒伍하니 不亦惜乎아
侯嬴長守於賤業
注+③ 史記曰 “魏有隱士侯贏, 家貧, 爲大梁夷門監者. 魏公子欲厚遺之, 不肯受, 曰 ‘臣修身絜行數十年, 終不以困故受公子財.’”하고 晨門肆志於抱關
注+④ 論語疏曰 “晨門, 閽人也.” 高士傳曰 “石門守者, 魯人也. 避世不仕, 自隱姓名, 爲魯守石門, 主晨夜開閉. 子路從孔子, 石門而宿, 問子路曰 ‘奚自?’ 子路曰 ‘自孔氏.’ 遂譏孔子曰 ‘是知其不可爲之者與.’ 時人賢焉.”하니 貧者
는 士之宜
어늘 豈爲鄙哉
아
巨卿이 敕縣代仲山이로대 仲山以先傭未竟이라하여 不肯去하다
1-6【
보補】
범거경范巨卿(
범식范式)이
형주자사荊州刺史였을 때였다.
注+①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 〈범식전范式傳〉에 “범식范式은 자가 거경巨卿이고, 다른 이름은 사汜이며, 산양山陽 금향金鄕 사람이다.” 하였다. 친구인
공중산孔仲山(
공숭孔嵩)이 집이 가난하여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성명을 바꾸고
신야현新野縣의
로 고용되었다.
注+②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공숭전孔嵩傳〉에 말하였다. “공숭孔嵩은 자가 중산仲山이고, 남양南陽 신야新野 사람이다. 아리阿里의 가졸街卒이 되었는데 몸가짐이 바르고 행실이 엄정하여 가街의 자제들이 모두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였다. 공부公府의 부름을 받아 경사에 갈 때 도중에 에 묵었는데 도적이 그의 말을 모두 훔쳐갔다. 얼마 뒤 물어서 공숭의 〈말이라는 것을〉 알고는 서로 책망하면서 ‘공중산은 선사善士인데 어찌 도둑을 맞기에 마땅하겠는가.’ 하고는 말을 돌려보내고 사죄하였다.” 범거경이 관할하는
군읍郡邑을 순시할 때가 되어 신야현에서 공중산을
도기導騎(길을 인도하는
기병騎兵)로 선발하였다. 범거경이 공중산을 보고 깜짝 놀라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대는 공중산이 아닌가. 내가 예전에 그대와 함께 긴 도포 자락을 끌면서
태학太學에서
했었지. 나는
국은國恩을 입어
자사刺史가 되었는데 그대는
도道를 품고 몸을 숨겨 군졸 가운데 있으니 또한 애석하지 않은가.”
“
후영侯嬴은 오랫동안 천한 업을 지켰고
注+③ ≪사기史記≫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후영侯贏 조條에 말하였다. “위魏나라에 은사隱士인 후영侯贏이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대량大梁의 을 지키는 자가 되었다. 위나라의 공자公子가 그에게 후하게 예물을 보내주고자 하였으나 받으려 하지 않고 ‘신이 몸가짐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한 지 수십 년이 되었으니 결코 곤궁하다는 이유로 공자의 재물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하였다.” 신문晨門은 관문을 지키면서 뜻대로 살았네.
注+④ ≪논어論語≫ 〈헌문憲問〉 소疏에 “신문晨門은 문지기이다.” 하였다.
≪고사전高士傳≫에 말하였다. “석문石門을 지키는 자는 노魯나라 사람이다. 세상을 피해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성명을 숨기고 노나라의 석문石門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새벽부터 밤까지 문을 열고 닫는 일을 주관하였다. 자로子路가 공자孔子를 따라 석문에서 묵게 되었는데, 신문晨門이 자로에게 ‘어디서 왔소?’ 하고 묻자 자로가 ‘공씨孔氏 문하에서 왔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그가 공자를 비웃기를, ‘불가능한 걸 알면서 하려는 그 사람이로군.’ 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현명하다고 하였다.” 가난이란 선비에게 당연한 것인데 어찌 비루하게 생각하는가.”
범거경이 현縣에 지시하여 〈다른 사람으로〉 공중산을 바꿔주도록 하였으나, 공중산은 앞서 맡은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려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