謝公時
에 逋亡
하여 多近竄南塘下諸舫中
하니 或欲求一時摉索
이어늘 謝公
이 不許
하고 云
若不容置此輩
면 何以爲京都
注+① 續晉陽秋曰 “自中原喪亂, 民離本域, 江左造創, 豪族并兼, 或客寓流離, 名籍不立. 太元中, 外禦强氐, 蒐簡民實, 三吳頗加澄檢, 正其里伍, 其中時有山湖遁逸往來都邑者. 後將軍安方接客時, 人有於坐言 ‘宜糾舎藏之失者.’ 安每以厚德化物, 去其煩細, 又以强寇入境, 不宜加動人情, 乃答之云 ‘卿所憂在於客耳. 然不爾, 何以爲京都?’ 言者有慚色.”아하다
注
劉云 “此語有可, 有不可. 遊手尙可容, 軍政不可忽也.”
6-21 사공謝公(사안謝安) 때 군졸 중에 도망한 자들이 대부분 가까이 남당南塘에 있는 선박들 안에 숨었다. 어떤 이가 일시에 수색하기를 원하자 사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였다.
“만약 이 무리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注+①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중원中原(낙양洛陽) 땅이 전란에 휩싸이고부터 백성이 본래 살던 곳을 떠나 강좌江左(건강建康)에서 새 출발을 하였는데, 호족이 이들을 겸병하여 어떤 이는 객客으로 부쳐 살고 어떤 이는 떠돌아다녀 명적名籍이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다. 태원太元(376∼396) 연간에 밖으로 강성한 저족氐族을 막고 민호民戶의 실제 수를 찾아내고자 삼오三吳 지역을 매우 철저히 조사하고 를 바로잡았다. 그 와중에 당시 산과 호수로 달아나 숨어 있으면서 도읍에 왕래하는 자들이 있었다. 후장군後將軍 사안謝安이 한창 빈객을 접대하고 있을 때 좌중에 있던 어떤 사람이 ‘〈도망자를〉 숨겨준 죄를 범한 자들을 적발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안은 늘 후한 덕으로 백성을 교화시키고 번잡한 법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또 강한 적이 국경 안에 침입하였으므로 백성의 마음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답하기를 ‘경이 우려하는 것은 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렇지 않으면 어떻게 큰 도읍[경도京都]이 되겠습니까.” 하니, 말한 자가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注
◦ 유진옹劉辰翁:이 말은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다.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그래도 용납할 수 있으나, 군정軍政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注
◦ 〈유효표劉孝標 주注에서 ‘산호山湖’의〉 ‘호湖’가 어떤 본에는 ‘호胡’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