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康成
注+① 范曄後漢書曰 “鄭玄, 字康成, 北海高密人. 八世祖崇, 哀帝時尚書僕射. 玄遇黨錮, 隱居著述, 凡百餘萬言. 大將軍何進辟玄, 乃縫掖相見. 玄長八尺餘, 鬚眉美秀, 姿容甚偉. 進待以賓禮, 授以几杖. 玄多所匡正, 不用而退. 袁紹辟玄, 及去, 餞之城東, 欲玄必醉, 會者三百餘人, 皆離席奉觴. 自旦至暮, 度玄飮三百餘桮, 而溫克之容, 終日無怠. 獻帝在許都, 徵爲大司農, 行至元城卒.”이 在袁冀州坐
注+② 袁山松後漢書曰 “袁紹, 字本初, 汝南汝陽人. 司空逢之庶子, 出後伯父成.” 英雄記曰 “紹不妄通賓客, 非海內知名, 不得相見. 又好游俠, 與張孟卓․何伯求․吳子卿․許子遠․伍德瑜爲奔走之友.러니 時
에 汝南應劭
도 亦歸於袁
注+③ 東觀漢記曰 “應劭, 字仲遠, 汝南南頓人. 父奉, 司隸校尉. 劭少便篤學, 博覽多聞.”이라 因起自贊
하여 曰
仲尼之門에 考以四科하고 回賜之徒는 不稱官閥이라하니
3-3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이
注+①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하였다. “정현鄭玄은 자字가 강성康成이고 북해北海 고밀高密 사람이다. 8대조인 정숭鄭崇은 애제哀帝 때에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지냈다. 정현은 를 만나 은거하며 저술을 하였으니 모두 백여만 자이다.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이 정현을 초청하자 이에 을 입고 만나보았다. 정현은 신장이 8척 남짓으로 수염과 눈썹이 아름답고 수려했으며 자태와 용모가 매우 훌륭하였다. 하진은 빈례賓禮로 대접하고 궤장几杖을 주었다. 정현이 〈하진의 잘못을〉 바로잡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하진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자 물러났다. 원소袁紹가 정현을 초청하여 떠나게 되자 〈사람들이〉 성城의 동쪽에서 전별하였는데, 정현을 반드시 취하게 하려고 모임에 왔던 사람들 3백여 명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올렸다.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정현은 3백여 잔을 마셨는데도, 온화하고 공경한 태도가 종일토록 흐트러지지 않았다. 헌제獻帝가 허도許都에 있으면서 불러 대사농大司農으로 삼았는데, 가다가 원성元城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원기주袁冀州(
원소袁紹)가 마련한 자리에 있었는데,
注+② 원산송袁山松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하였다. “원소袁紹는 자字가 본초本初이고 여남汝南 여양汝陽 사람이다. 사공司空을 지낸 원봉袁逢의 서자庶子인데, 백부伯父인 원성袁成의 양자로 가서 뒤를 이었다.”
에 말하였다. “원소는 함부로 빈객과 교제하지 않아서 천하의 이름난 자가 아니면 만날 수가 없었다. 또 유협游俠을 좋아하여 장맹탁張孟卓(장막張邈), 하백구何伯求(하옹何顒), 오자경吳子卿(오거吳巨), 허자원許子遠(허유許攸), 오덕유伍德瑜(오경伍瓊)와는 힘을 다해 서로를 도와주는 막역한 벗이었다.” 당시
여남汝南의
응소應劭도 원기주에게 와서 의탁하고 있어서
注+③ 에 말하였다. “응소應劭는 자字가 중원仲遠이고 여남汝南 남돈南頓 사람이다. 부친 응봉應奉은 사례교위司隸校尉를 지냈다. 응소는 어려서부터 독실하게 배워 널리 보고 많이 들었다.” 일어나 자신을 소개하였다.
“전前 태산태수泰山太守 응중원應仲遠(응소)이 북면北面하여 제자弟子라고 칭하겠습니다. 어떠하신지요?”
“
중니仲尼(
공자孔子)의
문하門下에서는 〈제자들을〉
로 분류하였고,
안회顔回와
단목사端木賜(
자공子貢)의 무리는 관직이나 가문을 칭하지 않았습니다.”
안회顔回
그러자 응소가 부끄러워하는 낯빛을 띠었다.
자공子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