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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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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子猷․子敬兄弟 共賞高士傳人及贊이러니 子敬 賞井丹高潔하니 子猷云
未若長卿慢世注+① 嵇康高士傳曰 “丹, 字大春, 扶風郿人. 博學高論, 京師爲之語曰 ‘五經紛綸井大春, 未嘗書刺謁一人.’ 北宮五王更請, 莫能致. 新陽侯陰就使人要之, 不得已而行. 侯設麥飯․葱菜, 以觀其意, 丹推却曰 ‘以君侯能供美膳, 故來相過, 何謂如此.’ 乃出盛饌. 侯起, 左右進輦, 丹笑曰 ‘聞桀紂駕人車, 此所謂人車者邪?’ 侯即去輦. 越騎梁松, 貴震朝廷, 請交丹, 丹不肯見. 後丹得時疾, 松自將醫視之. 病愈久之, 松失大男磊, 丹一往弔之, 時賓客滿庭, 丹裘褐不完, 入門, 坐者皆悚, 望其顔色. 丹四向長揖, 前與松語, 客主禮畢後, 長揖徑坐, 莫得與語. 不肯爲吏徑出, 後遂隱遁. 其贊曰 ‘井丹高潔, 不慕榮貴. 抗節五王, 不交非類. 顯譏輦車, 左右失氣. 披褐長揖, 義陵群萃.’
司馬相如初爲郞, 事景帝. 梁孝王來朝, 從遊說士鄒陽等, 相如說之, 因病免遊梁. 後過臨邛, 富人卓王孫女文君新寡, 好音, 相如以琴心挑之, 文君奔之, 俱歸成都. 後居貧, 至臨邛買酒舍, 文君當壚, 相如著犢鼻㡓, 滌器市中. 爲人口吃, 善屬文. 仕宦不慕高爵, 常託疾不與公卿大事. 終于家. 其贊曰 ‘長卿慢世, 越禮自放. 犢鼻居市, 不恥其狀. 託疾避官, 蔑此卿相. 乃賦大人, 超然莫尙.’”
라하다


18-44 왕자유王子猷(왕휘지王徽之)와 왕자경王子敬(왕헌지王獻之) 형제가 함께 ≪고사전高士傳≫의 인물과 〈그들의〉 을 감상하고 있었다. 왕자경이 정단井丹고결高潔함을 칭송하니 왕자유가 말했다.
사마장경司馬長卿(사마상여司馬相如)이 세속世俗을 업신여긴 것만 못하다.”注+혜강嵇康의 ≪고사전高士傳≫에 말했다. “정단井丹대춘大春으로 부풍扶風 사람이다. 학문이 넓고 담론이 고상하여 경사京師의 사람들이 이 때문에 ‘오경五經에 조예 깊은 정대춘井大春은 한 번도 누구에게 명함을 올린 적이 없네.’라고 하였다. 이 번갈아가며 초청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를〉 불러오지 못했다. 신양후新陽侯 음취陰就가 사람을 시켜 길을 막게 하자, 하는 수 없이 갔다. 신양후는 보리밥과 나물반찬을 차려놓고 그의 의중을 살펴보았다. 정단이 〈상을〉 물리며 ‘군후君侯는 좋은 음식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찾아 왔거늘 어찌 이럴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라고 하자, 이에 성찬을 내왔다. 신양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좌우의 시종하는 이들이 을 대령하였다. 정단이 웃으며 ‘가 사람수레(인차人車)를 몰았다고 들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람수레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신양후가 곧바로 연을 치우게 하였다. 월기교위越騎校尉 양송梁松 정단에게 교제하자고 청했으나 정단은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뒤에 정단이 돌림병에 걸리자 양송이 직접 의원을 데리고 병문안 갔다. 병이 낫고 한참 지나서 양송의 큰아들인 양뢰梁磊가 죽어 정단이 한 번 가서 조문했다. 그때 빈객들이 뜰에 가득했는데 정단은 남루한 복장으로 문으로 들어가자 앉아있던 이들이 모두 깜짝 놀라 그의 안색을 바라보았다. 정단은 사방을 향해 길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 양송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님과 주인 간의 예가 끝난 뒤 길게 읍하고 곧바로 자리에 앉았는데,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하였다. 관리가 되려는 생각이 없어 곧바로 〈도성을〉 나갔고 뒤에 마침내 은둔하였다. 그 에 ‘정단은 고결高潔하여 부귀영화를 부러워하지 않았네. 오왕五王에게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다른 부류의 사람은 사귀지 않았네. 거리낌 없이 연거輦車를 비꼬니 좌우左右의 사람들 숨을 죽였지. 거친 옷 걸치고 길게 읍하니 절의는 많은 사람을 능가하였네.’라고 하였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처음에 이 되어 경제景帝(유계劉啓)를 섬겼다. 양효왕梁孝王(유무劉武)이 내조來朝하면서 유세를 잘하는 추양鄒陽 등을 데리고 왔는데, 사마상여는 그들이 마음에 들어 병을 핑계로 면직하고 지역을 유람하였다. 뒤에 임공臨邛에 들렀을 때 부자인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이 남편을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음악을 좋아하였기에 사마상여가 거문고로 마음을 표현하여 유혹하였다. 탁문군이 몰래 그에게로 왔고 둘은 함께 성도成都로 돌아왔다. 뒤에 가난해지자 임공으로 가서 술집을 샀다. 탁문군은 술청에 앉아 술을 팔고 사마상여는 앞치마를 두르고 저잣거리 가운데서 그릇을 씻었다. 사람 됨됨이로는 말을 더듬었으나 글을 잘 지었다. 벼슬하면서도 높은 지위를 부러워하지 않았고, 늘 질병을 핑계로 공경公卿대사大事에 관여하지 않았다.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서 죽었다. 그 찬에 ‘장경長卿은 세속을 업신여기며 예법을 무시하고 자유분방하였네. 앞치마를 두르고 저잣거리에 살면서도 그런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네. 병을 핑계대어 관직을 피하고 경상卿相을 무시했네. 이에 〈대인부大人賦〉를 지으니 뛰어남에 더할 것이 없어라.’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北宮의 五王 : 北宮은 東漢 光武帝의 妃인 光武郭皇后를 가리킨다. 질투하고 흉악․잔인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中山國太后에 봉해졌고 北宫으로 거처를 옮겼다. 五王은 곽태후 소생의 다섯 왕인 東海恭王 劉疆, 沛獻王 劉輔, 濟南安王 劉康, 阜陵質王 劉延, 山間王 劉焉이다.
역주2 朝廷을……높았는데 : 梁松은 光武帝의 사위로 舞陰公主의 남편이다. 경서에 해박하고 옛일을 잘 알았기 때문에 예법과 국가 전례에 관한 논의에 학자들과 함께 늘 참여하였고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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