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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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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尙之 爲丹陽尹注+① 宋書曰 “何尙之, 字彦德, 廬江灊人. 曾祖準, 高尙不仕, 祖恢, 南康太守, 父叔度, 恭謹有行業. 尙之雅好文義, 從容賞會, 甚爲宋太祖所知, 官至侍中․尙書令.” 更置玄學於南郭外하니 一時名士 慕道來遊 王倩玉注+② 宋書曰 “王球, 字倩玉, 瑯琊臨沂人. 父謐, 司徒. 球素簡貴, 不交遊. 江夏王義恭嘗謂何尙之曰 ‘當今乏才, 群下宜加戮力, 而王球放恣, 恐宜以法糾之.’ 尙之曰 ‘球有素尙, 未可以文案索也.’ 官至太子詹事․大夫․尙書僕射.” 嘗稱之曰
尙之 西河之風 不墜注+③ 西河, 子夏所居.라하다


9-24 【
하상지何尙之단양윤丹陽尹이 되었을 때注+① ≪송서宋書≫ 〈하상지열전何尙之列傳〉에 말하였다. “하상지는 언덕彦德으로, 여강廬江 사람이다. 증조부 하준何準은 〈그 뜻을〉 고상히 지켜 벼슬하지 않고, 조부 하회何恢남강태수南康太守를 역임하며, 부친 하숙도何叔度는 공손하고 삼가며 덕행과 학업이 있었다. 하상지는 평소에 문장을 좋아하고 차분히 술 마시면서 담론했는데, 〈남조南朝 태조太祖에게 크게 인정받고 관직이 시중侍中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남곽南郭 밖에 현학관玄學館을 다시 설치하니,
당대의 명사들이 를 흠모하여 찾아왔다. 왕천옥王倩玉(왕구王球)이注+② ≪송서宋書≫ 〈왕구열전王球列傳〉에 말하였다. “왕구는 천옥倩玉으로, 낭야瑯琊 임기臨沂 사람이다. 부친 왕밀王謐사도司徒를 역임하였다. 왕구는 평소 도도하고 고귀한 체 하여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았다. 강하왕江夏王 왕의공王義恭이 한번은 하상지에게 ‘현재는 인재가 부족하니 백관들이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해야 하는데, 왕구는 오만방자하니 아마 국법으로 바로잡아야 할 듯하오.’ 하니, 하상지가 ‘왕구에게는 소박하고 고상한 지조가 있으니 문안文案(공문서)으로 잡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왕구는〉 관직이 태자첨사太子詹事대부大夫상서복야尙書僕射에 이르렀다.” 일찍이 이 일에 대해 칭찬하였다.
“하상지에게는 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구나.”注+서하西河는 〈공자孔子의 제자〉 자하子夏가 거처하던 곳이다.


역주
역주1 何尙之가……설치하니 : 南朝 宋 文帝 元嘉 13년(436)에 하상지에게 玄學館을 개설하여 생도를 교육하게 했는데, 이때의 ‘玄學’은 佛學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현학과 불학이 서로 융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현학’이 ‘불학’을 지칭하기도 하고 ‘老莊의 현학’을 가리키기도 하였다.(盧盛江, ≪魏晉玄學與中國文學≫ 2쪽, 百花洲文藝出版社, 2002)
역주2 西河의 기풍 : 孔子의 제자 子夏가 만년에 서하에서 강학하면서 魏나라 文侯의 스승이 되자, 주변에 유학이 크게 번성하였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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