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空表聖은 預爲壙하고 故人來者면 引置內하여 賦詩對酌이라 人或難之면 表聖曰
我非止暫遊此中
이니 公何不廣耶
注+① 宋祁唐書曰 “司空圖, 字表聖, 河中虞鄕人, 累官中書舍人. 昭宗召拜兵部侍郞, 會遷洛陽, 柳璨希賊意, 誅天下才望, 助喪王室. 詔圖入朝, 圖陽墮笏, 意趣野耄, 璨知無意於世, 乃聽還. 居中條山王官谷, 遂隱不出.”아하다
13-30 【보補】 사공표성司空表聖(사공도司空圖)은 미리 광壙(묘실墓室)을 만들어놓고 벗이 방문하면 〈그를〉 묘실 안으로 끌고 들어가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손님이 간혹 난감해하면 사공표성이 말하였다.
“
그대는 어찌 〈도량이〉 넓지 못하시오?”
注+① 송기宋祁의 ≪신당서新唐書≫ 〈사공도열전司空圖列傳〉에 말하였다. “사공도는 자字가 표성表聖으로, 하중河中 우향虞鄕 사람이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소종昭宗이 〈화주華州에 있을 때 그를〉 불러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제수하려고 했는데, 〈족질足疾을 핑계로 사양하고 귀향을 간청하였다.〉 그때 마침 〈이 소종을〉 낙양洛陽으로 옮기려 했는데, 이 적신賊臣(주전충)의 뜻에 영합하려고 천하의 재능과 명망 있는 사람을 주살하여 〈당나라〉 왕실의 쇠퇴를 가속화하려 했다. 사공도에게 조서를 내려 입조入朝하게 하자, 사공도가 〈일부러〉 홀笏을 떨어뜨려 초라하고 노쇠한 뜻을 드러내 보이자, 유찬은 〈그가〉 세상에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귀향할 것을 허락하였다. 중조산中條山의 왕관곡王官谷에 거처하면서 마침내 은거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