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大將軍旣亡에 王應은 欲投世儒한대 世儒는 爲江州요 王含은 欲投王舒한대 舒는 爲荊州라 含語應曰
此迺所以宜往也
注+① 含別傳曰 “含, 字處弘, 瑯琊臨沂人. 累遷徐州刺史, 與弟敦作逆誅.” 晉陽秋曰 “應, 字安期, 含子也. 敦無子, 養爲嗣, 以爲武衛將軍, 用爲副貳. 伏誅.”이니이다 江州
는 當人彊盛時
하여 能抗
하니 此
는 非常人所行
이니이다 及覩衰危
하얀 必興愍惻
注+② 王彬別傳曰 “彬, 字世儒, 瑯琊人. 祖覽父正, 竝有名德. 彬爽氣出儕類, 有雅正之韻. 與元帝姨兄弟, 佐佑皇業, 累遷侍中. 從兄敦下石頭, 害周伯仁, 彬與顗素善, 往哭其尸甚慟. 旣而見敦, 敦怪其有慘容而問之, 答曰 ‘向哭周伯仁, 情不能已.’ 敦曰 ‘伯仁自致刑戮, 汝復何爲者哉?’ 彬曰 ‘伯仁淸譽之士, 有何罪?’ 因數敦曰 ‘抗旌犯上, 殺戮忠良’, 音辭忼慨, 與淚俱下. 敦怒甚, 丞相在坐, 代爲之解, 命彬曰 ‘拜謝’, 彬曰 ‘有足疾, 比來見天子, 尙不能拜, 何跪之有?’ 敦曰 ‘脚疾何如頸疾?’ 以親故不害之. 累遷江州刺史ㆍ左僕射, 贈衛將軍.”이리이다 荊州
는 守文
하니 豈能作意表行事
리이까하다
含不從
하고 遂共投舒
한대 舒果沈含父子于江
注+③ 王舒傳曰 “舒, 字處明, 瑯琊人. 祖覽知名, 父會御史. 舒器業簡素, 有文武幹. 中宗用爲北中郞將ㆍ荊州刺史ㆍ尙書僕射. 出爲會稽太守, 以父名會, 累表自陳. 討蘇峻有功, 封彭澤侯. 贈車騎大將軍.”이라 彬聞應當來
하고 密具船以待之
라가 竟不得來
하니 深以爲恨
注+④ 含之投舒, 舒遣軍逆之, 含父子赴水死. 昔酈寄賣友見譏, 况販兄弟以求安, 舒非人矣.이라
注
劉云 “英賢獨見, 爲鑒後來, 龜不自靈, 可傷可戒! 彬未必不以滅親自詭, 不知舒復如何.”
14-21 왕대장군王大將軍(왕돈王敦)이 패망한 뒤 왕응王應은 세유世儒(왕빈王彬)에게 의탁하려 하였는데, 세유는 강주자사江州刺史였다. 왕함王含은 왕서王舒에게 의탁하려 하였는데, 왕서는 형주자사荊州刺史였다. 왕함이 〈아들인〉 왕응에게 말하였다.
“
〈그걸 알면서도〉 너는 그에게 귀의하려 하느냐?”
“이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注+① 〈왕함별전王含別傳〉에 말하였다. “왕함王含은 자字가 처홍處弘이고, 낭야瑯琊 임기臨沂 사람이다. 여러 번 승진하여 서주자사徐州刺史에 이르렀는데 아우인 왕돈王敦과 반역을 일으켜 처형되었다.”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왕응王應은 자字가 안기安期이고, 왕함王含의 아들이다. 왕돈에게 아들이 없어 그를 입양하여 후사로 삼고, 무위장군武衛將軍으로 삼아 자신의 보좌로 썼다. 〈후에〉 처형되었다.” 강주(왕빈)는 상대가
이는 보통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급한 처지의 사람을 보게 되면 필시 측은해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입니다.
注+② 〈왕빈별전王彬別傳〉에 말하였다. “왕빈王彬은 자字가 세유世儒이고, 낭야瑯琊사람이다. 조부 왕람王覽과 부친 왕정王正은 모두 덕으로 이름났다. 왕빈은 호방한 기개가 동년배보다 뛰어났고 아정雅正한 운치가 있었다. 원제元帝(사마예司馬睿)와 이종 형제 사이로 황업皇業을 보좌하였으며 누차 승진하여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종형從兄 왕돈王敦이 석두石頭로 내려가서 주백인周伯仁(주의周顗)을 해쳤을 때, 왕빈은 주의와 평소 친하게 지냈으므로 그의 시신屍身 앞에 가서 매우 애통하게 곡하였다. 얼마 뒤 왕돈을 만났는데, 왕돈은 그가 참담한 모습인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지난번에 주백인을 곡하였는데 슬픈 정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돈이 말하기를 ‘주백인은 스스로 죽임을 초래하였으니 네가 더 이상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하니, 왕빈이 ‘백인伯仁은 깨끗하고 명예로운 선비인데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왕돈을 비난하여 말하기를, ‘〈종형은〉 깃발을 내걸고 윗사람을 범하였으며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살육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언사가 강개하였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왕돈이 크게 노하자 승상丞相(왕도王導)이 좌중에 있다가 그를 위해 대신 변명하며, 왕빈에게 ‘절하고 사죄하거라.’ 하니 왕빈이 말하였다 ‘족질足疾이 있어 근래 천자를 만나서도 절을 할 수 없었는데 어찌 무릎을 꿇겠습니까.’ 그러자 왕돈이 말하기를 ‘발 아픈 것이 어찌 목이 〈잘려〉 아픈 것과 같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결국〉 친척이기 때문에 해치지는 않았다. 누차 승진하여 강주자사江州刺史ㆍ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고 위장군衛將軍에 추증되었다.” 형주(왕서)는 법도를 준수하니 어찌 예상 밖의 일을 만들겠습니까.”
왕함이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마침내 둘이 같이 왕서에게 의탁하였는데, 왕서는 결국 왕함 부자를 강에 빠져 죽게 하였다.
注+③ 〈왕서전王舒傳〉에 말하였다. “왕서王舒는 자字가 처명處明이고, 낭야瑯琊 사람이다. 조부 왕람王覽은 이름이 알려졌고, 부친 왕회王會는 어사御史였다. 왕서는 기국器局과 덕업德業이 대범하고 소박하였고 문무를 겸비하였다. 중종中宗(진晉 원제元帝:사마예司馬睿)이 임용하여 북중랑장北中郞將ㆍ형주자사荊州刺史ㆍ상서복야尙書僕射로 삼았다. 지방관으로 나가 회계태수會稽太守가 되었을 때는 부친의 이름이 회會였기 때문에 여러 번 표문表文을 올려 스스로 〈부임할 수 없는 사정을〉 진술하였다. 소준蘇峻을 토벌하는 데 공이 있어 팽택후彭澤侯에 봉해졌다.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에 추증되었다.” 왕빈은 왕응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몰래 배를 준비해놓고 기다리다가 결국 올 수 없게 되자 무척 한스럽게 여겼다.
注+④ 왕함王含이 왕서王舒에게 몸을 맡기려 하였는데 왕서가 군대를 보내 그것을 막으니, 왕함 부자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예전에 더구나 형제를 팔아 편안함을 구했으니 왕서는 사람도 아니다.
注
◦ 유신옹劉辰翁:영웅과 현자의 특출한 식견은 후세의 귀감이 되지만, 거북도 스스로는 신령스럽지 못하였으니 애석하고 경계할 만하다. 왕빈王彬은 필시 친척을 죽게 한 것으로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왕서王舒는 또 어떠하였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