郗超가 與傅瑗으로 周旋하거늘 瑗이 見其二子한대 竝總髮이라 超가 觀之良久하고 謂瑗曰
小者가 才名皆勝이나 然保卿家는 終當在兄이리라하니
即傅亮兄弟也
라注+① 傅氏譜曰 “瑗, 字叔玉, 北地靈州人. 歷護軍長史ㆍ安城太守.” 宋書曰 “迪, 字長猷, 瑗長子也. 位至五兵尙書, 贈太常.” 丘淵之文章錄曰 “亮, 歷尙書令, 任光祿大夫. 元嘉三年, 以罪伏誅.”
14-14
는
부원傅瑗과 교유하였다. 부원이 자신의 두 아들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총각 머리를 한 어린아이들이었다. 치초가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 부원에게 말하였다.
“작은 애가 재주와 명성 모두 뛰어날 것이나, 경의 집안을 보존하는 것은 결국 형에게 달려 있을 것이오.”
바로
부량傅亮 형제를 두고 한 말이었다.
注+① ≪부씨보傅氏譜≫에 말하였다. “부원傅瑗은 자字가 숙옥叔玉이고, 북지北地 영주靈州 사람이다. 호군장사護軍長史ㆍ안성태수安城太守를 역임하였다.”
≪송서宋書≫ 〈부량전傅亮傳〉에 말하였다. “부적傅迪은 자字가 장유長猷이고, 부원傅瑗의 장자長子이다. 지위가 오병상서五兵尙書에 이르렀고, 태상太常에 추증되었다.”
의 ≪문장록文章錄≫에 말하였다. “부량傅亮은 상서령尙書令을 역임하였고,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되었다. 원가元嘉 3년(426)에 죄를 지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