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郗超 與傅瑗으로 周旋하거늘 見其二子한대 竝總髮이라 觀之良久하고 謂瑗曰
小者 才名皆勝이나 然保卿家 終當在兄이리라하니
即傅亮兄弟也注+① 傅氏譜曰 “瑗, 字叔玉, 北地靈州人. 歷護軍長史ㆍ安城太守.” 宋書曰 “迪, 字長猷, 瑗長子也. 位至五兵尙書, 贈太常.” 丘淵之文章錄曰 “亮, 歷尙書令, 任光祿大夫. 元嘉三年, 以罪伏誅.”


14-14 부원傅瑗과 교유하였다. 부원이 자신의 두 아들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총각 머리를 한 어린아이들이었다. 치초가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 부원에게 말하였다.
“작은 애가 재주와 명성 모두 뛰어날 것이나, 경의 집안을 보존하는 것은 결국 형에게 달려 있을 것이오.”
바로 부량傅亮 형제를 두고 한 말이었다.注+① ≪부씨보傅氏譜≫에 말하였다. “부원傅瑗숙옥叔玉이고, 북지北地 영주靈州 사람이다. 호군장사護軍長史안성태수安城太守를 역임하였다.”
송서宋書≫ 〈부량전傅亮傳〉에 말하였다. “부적傅迪장유長猷이고, 부원傅瑗장자長子이다. 지위가 오병상서五兵尙書에 이르렀고, 태상太常에 추증되었다.”
의 ≪문장록文章錄≫에 말하였다. “부량傅亮상서령尙書令을 역임하였고,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되었다. 원가元嘉 3년(426)에 죄를 지어 처형되었다.”


역주
역주1 郗超 : 336~378. 字는 景兴 또는 敬舆이고, 小字는 嘉宾이며, 高平 金乡 사람이다. 大司马参军ㆍ散骑侍郎ㆍ中书侍郎ㆍ司徒左长史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桓温의 谋主로서 황제를 폐위시켜 위엄을 세울 것을 환온에게 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환온이 3차 北伐에 패하여 돌아온 뒤 죽자, 모친상을 이유로 관직을 떠났다. 草書에 뛰어났고 佛学에 정통하여 ≪奉法要≫를 저술하였다.(≪晉書≫ 〈郗超傳〉)
역주2 丘淵之 : 宋(南朝)의 詩人으로 字는 思玄이고, 吴兴郡 乌程县(지금의 浙江 湖州) 사람이다. 丘深之 또는 丘泉之라고도 한다. 刘义隆이 刘裕를 따라 北伐할 때부터 참여하여 徐州长史 등을 지냈으며, 유의륭이 즉위하여 宋 文帝가 된 이후에는 散骑常侍ㆍ侍中ㆍ吴郡太守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이 있었으나 散失되었다.(≪宋書≫ 〈丘淵之傳〉)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