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伯鸞
은 少孤
하여 獨止
하고 不與人同食
이러니 比舍先炊已
에 呼伯鸞
하여 及熱釡炊
하니 伯鸞曰
滅竈
하고 更燃之
注+① 范曄後漢書曰 “梁鴻, 字伯鸞, 扶風平陵人. 受業太學, 家貧尙節介, 博覧不爲章句. 學畢, 牧豕上林苑中, 誤遺火, 延及他舍. 鴻尋訪燒者, 悉以豕償之, 其主猶以爲少. 鴻曰 ‘無他財, 願以身居作.’ 因爲執, 勤不懈, 隣家耆老共責讓主人, 而稱鴻長者. 始敬異焉, 悉還其豕, 鴻不受而去歸鄕里. 勢家慕其高節, 多欲女之, 鴻並不娶.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父母問其故. 女曰 ‘欲得賢如梁伯鸞者.’ 鴻聞而聘之. 始以裝飾入門, 七日而鴻不答, 妻跪牀下, 請曰 ‘竊聞夫子高義, 簡斥數婦, 妾亦偃蹇數夫, 今而見擇, 敢不請罪?’ 鴻曰 ‘吾欲裘褐之人可與俱隱深山者, 今衣綺縞, 傅粉墨, 豈鴻所願哉.’ 妻曰 ‘以觀夫子之志耳.’ 乃更爲椎髻, 著布衣, 操作而前, 鴻大喜曰 ‘此眞梁鴻妻也.’ 字之曰德曜, 名孟光. 居有頃, 妻曰 ‘常聞夫子欲隱居避患, 今何爲黙黙? 無乃欲低頭就之乎?’ 鴻曰 ‘諾.’ 乃入陵山中, 以耕織爲業, 詠詩彈琴以自娛. 仰慕高士, 爲四皓以來二十四人作頌. 因東出關過京, 作五噫歌曰 ‘陟彼北芒兮噫. 顧覧帝京兮噫. 宮室崔嵬兮噫. 人之劬勞兮噫. 遼遼未央兮噫.’ 肅宗聞而非之, 乃易姓名, 居齊魯之間. 有頃, 去適吳, 作詩曰 ‘遊舊邦兮遐征, 將遙集兮東南. 心惙怛兮傷悴, 志菲菲兮升降. 欲乗策兮縱邁, 疾吾俗兮作讒. 競擧枉兮措直, 咸先佞兮唌唌. 固靡慙兮獨建, 冀異州兮尙賢. 聊逍遙兮遨嬉, 纘仲尼兮周流. 儻云覩兮我悅, 遂舍車兮即浮. 過季札兮延陵, 求魯連兮海隅. 雖不察兮光貌, 幸神靈兮與休. 惟季春兮華阜, 麥含含兮方秀. 哀茂時兮逾邁, 愍芳香兮日臭. 悼吾心兮不獲, 長委結兮焉究. 口囂囂兮余訕, 嗟恇恇兮誰留.’ 至呉依臯伯通, 居廡下, 爲人賃舂. 妻具食, 擧案齊眉, 伯通異之曰 ‘彼傭能使其妻敬之如此, 非凡人也.’ 乃舍之於家. 鴻潜閉著書十餘篇. 疾且困, 告主人曰 ‘昔延陵季子葬子嬴博之間, 不歸鄕里, 慎勿令我子持喪歸.’ 及卒, 伯通爲求葬地於要離塚傍, 咸曰要離烈士, 伯鸞清高, 可令相近.‘ 葬畢, 妻子歸扶風.”하다
注
李云 伯通亦非常人, 鴻可謂得所主矣. 又誰知鴻眞烈士乎. 何說淸高也.
1-5【
보補】
양백란梁伯鸞(
양홍梁鴻)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항상 홀로 지냈고 남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이웃집에서 먼저 밥을 하고 난 뒤에 양백란을 불러 불이 있을 때 솥에 밥을 하라 하니 양백란이 말하였다.
양홍梁鴻
“동자 홍鴻은 남의 불에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아궁이의 불을 끈 뒤 다시 불을 붙였다.
注+①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양홍전梁鴻傳〉에 말하였다.
“양홍梁鴻은 자가 백란伯鸞으로,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이다. 태학太學에서 수업할 때 집이 가난하였으나 절개節介를 숭상하였고 전적을 두루 열람하였으나
학업을 마친 뒤 상림원上林苑에서 돼지를 쳤는데, 실수로 불을 내 이웃집까지 불이 번졌다. 양홍이 불에 탄 집을 찾아가 모두 돼지로 배상하였으나 그 주인은 여전히 배상이 적다고 여겼다. 양홍이 ‘다른 재물이 없으니 제가 고용살이를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그 집에 잡혀 살았다. 양홍이 부지런히 일하고 게으르지 않으니 이웃의 노인들이 모두 주인을 비난하고 양홍을 장자長者라고 칭찬하였다. 〈그 주인이〉 그제야 양홍을 존경하고 다르게 대하며 그의 돼지를 다 돌려주려 하였다. 양홍은 받지 않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권세 있는 가문에서 그의 고상한 절개를 사모하여 그를 사위 삼으려 하는 곳이 많았으나 양홍이 모두 아내 삼지 않았다. 같은 현에 사는 맹씨孟氏에게 딸이 있는데 살찌고 추하며 살빛이 검고 힘이 돌절구를 들 정도로 셌다. 딸이 혼인 상대를 가리며 시집가지 않자 부모가 까닭을 물었다. 딸이 ‘양백란처럼 어진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습니다.’ 하였다. 양홍이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장가들었다. 〈처妻가〉 처음에 치장하고 문에 들어가자 7일 동안 양홍이 상대하지 않으니 그 처가 침상 아래 무릎을 꿇고 청하였다. ‘제가 듣기에, 부자夫子는 고상하고 정의로워 여러 명의 여자를 멀리하였다 하고, 첩妾 역시 여러 남자들에게 오만하게 대하다가 지금에야 간택을 받았으니 어찌 죄를 청하지 않겠습니까.’ 양홍이 ‘나는 허름한 옷을 입고 함께 깊은 산에 은거할 만한 사람을 원했는데 〈그대는〉 지금 화려한 옷을 입고 분칠을 하였으니 어찌 내가 원하던 짝이겠는가?’ 하니, 처가 ‘부자夫子의 의지를 살펴보려 그런 것일 뿐입니다.’ 하고는 다시 머리에 쪽을 찌고 베옷을 입었으며 나왔다. 양홍이 크게 기뻐하며 ‘이 사람이 진정 나의 처이다.’ 하고 덕요德曜라고 자字를 지어주었다. 처의 이름은 맹광孟光이다.
얼마 있다 처가 ‘첩은 늘 부자께서 은거하여 환란을 피하고자 한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찌 묵묵히 계십니까? 머리를 조아리고 〈권세가에게〉 나아가려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양홍이 ‘그 말이 맞소.’라고 하고 마침내 패릉산霸陵山에 들어가 밭 갈고 길쌈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즐겼다.
고사高士를 사모하여 이후의 24인을 위한 노래를 지었다. 동쪽으로 관문關門을 나가 경사京師를 지나며 〈오희가五噫歌〉를 지었다.
저 북망산北芒山에 오름이여, 아
황경皇京을 돌아봄이여, 아
궁실이 높고 높음이여, 아
사람들의 수고로움이여, 아
까마득히 끝이 없음이여, 아
숙종肅宗(후한後漢 장제章帝)이 듣고 비난하자 마침내 성명을 바꾸고 제齊와 노魯 사이에서 살았다. 얼마 뒤에 그곳을 떠나 오吳로 갈 때 시를 지었다.
유람하러 멀리 가서
장차 저 동남쪽에 모이려 하네
마음은 근심으로 애가 타고
뜻은 갈팡질팡 오락가락
수레 타고 채찍 휘두르며 맘껏 달리고프니
참언讒言 일삼는 우리네 세태 싫어라
앞다퉈
모두들 앞장서 아첨하며 참소하네
실로 부끄럽지 않게 홀로 섰으니
다른 고을에서 어진 이 높여주길 기대하네
오로지 소요하며 즐겁게 노닐면서
천하를 주유했던 중니仲尼(공자)를 따르리라
만일 내 기뻐하는 이 볼 수 있다 하면
마침내 수레 버리고 배에 오르리
그들의 빛나는 모습 볼 수 없더라도
그들의 신령과 함께 아름다워지길 바라네
늦봄이라 꽃 흐드러지고
보리 익어 한창 이삭이 패였네
애달프다 한창때는 갈수록 멀어져가고
가엾어라 꽃향기는 날로 악취 풍기리니
슬프다 내 마음의 이루지 못함이여
오랜 회한 어찌 다할 수 있으리
쑥덕쑥덕 입으로 날 비난하니
아, 두렵구나 누구에게 가 머물까나
오吳에 이르러 고백통臯伯通에게 의지하여 곁채에 살면서 남을 위해 곡식을 빻아주는 일을 하였다. 그 처가 밥을 차려줄 때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올리니 고백통이 기이하게 여기기를, ‘저 머슴이 자기 처에게 저처럼 공경받을 수 있으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고는 자기 집에 살게 하였다. 양홍은 문을 닫고 남몰래 글 10여 편을 지었다.
병들고 곤궁하게 되자 주인에게 고하기를, ‘옛날에 부디 제 아들이 상구喪具를 가지고 돌아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그가 죽자 고백통이 의 무덤 곁에 장지葬地를 구해주니, 모두 말하기를 ‘요리는 열사烈士요, 백란은 청고淸高한 사람이니 서로 가깝게 둘 만하다.’라 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 그의 처자妻子는 부풍扶風으로 돌아갔다.”
注
◦ 왕세무王世懋:이러한 절개는 바보에 가깝다.
注
◦ 이지李贄:고백통臯伯通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니 양홍梁鴻은 제대로 주인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또 누가 양홍이 진정한 열사임을 알았겠으며, 누가 청고淸高하다고 말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