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頴)[潁]川太守
가 髡陳仲弓
注+① 按寔之在鄕里, 州郡有疑獄不能決者, 皆將詣寔. 或到而情首, 或中途改辭, 或託狂悸. 皆曰 “寧爲刑戮所苦, 不爲陳君所非.” 豈有盛德感人若斯之甚, 而不自衛, 反招刑辟. 殆不然乎. 此所謂‘東野之言’耳.하니 客有問元方
하되
易
에 稱 二人同心
이면 其利斷金
이요 同心之言
은 其臭如蘭
注+② 王廙注繫辭曰 “金, 至堅矣, 同心者其利無不入, 蘭, 芳物也, 無不樂者. 言其同心者, 物無不樂也.”이라하니 何有高明之君而刑忠臣孝子者乎
아하니
昔
에 高宗
은 放孝子孝己
注+③ 帝王世紀曰 “殷高宗武丁有賢子孝己, 其母蚤死. 高宗惑後妻之言, 放之而死, 天下哀之.”하고 尹吉甫
는 放孝子伯奇
注+④ 琴操曰 “尹吉甫, 周卿也. 有子伯奇, 母死更娶. 後妻生子曰伯邽, 乃譖伯奇於吉甫, 於是放伯奇於野. 宣王出遊, 吉甫從, 伯奇乃作歌, 以言感之. 宣王聞之曰 ‘此孝子之辭也.’ 吉甫乃求伯奇於野, 而射殺後妻.”하고 董仲舒
는 放孝子符起
하니 唯此三君
은 高明之君
이요 唯此三子
는 忠臣孝子
라하니
注
王云 “按漢書寔傳, 有殺人者, 同縣楊吏以疑寔, 縣遂逮繫考掠, 無實而後得出. 正與此合, 豈正史亦東野之言乎. 恐亦非孝標注也.”
3-6
영천태수潁川太守가
진중궁陳仲弓(
진식陳寔)을 삭발하는 형벌[
곤髡]에 처했다.
注+① 살펴보건대 진식陳寔이 향리에 있을 때에 주군州郡에 해결할 수 없는 의심스러운 옥사[의옥疑獄]가 있으면 모두 진식에게 가지고 왔다. 혹자는 도착하여 사실대로 고하기도 하고, 혹자는 중간에 말을 바꾸기도 하고, 혹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핑계대기도 하였다. 모두가 “차라리 형륙刑戮으로 고통을 받을망정 진군陳君(진식)에게 비난받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진식의 성대한 덕이 사람들을 이와 같이 크게 감화시켰는데도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형벌을 초래하는 일이 어찌 있었겠는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았을 듯하다. 이것은 이른바 ’일 따름이다. 객客이
진원방陳元方(
진기陳紀)에게 물었다.
“족하足下의 가군家君(진식)은 어떤 분이십니까?”
“≪
주역周易≫에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면 그 예리함이 쇠를 자를 만하고, 마음을 함께한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注+② 왕이王廙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주석에서 말하였다. “쇠는 지극히 견고하지만 마음을 같이하는 경우 그 날카로움은 어떤 것도 뚫고 들어갈 수 있으며, 란蘭은 향기로운 물건으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다. 마음을 같이하는 이들은 남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그렇게나 잘못된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므로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동중서董仲舒
“옛날
은殷 고종高宗은 효자인
효기孝己를 내쳤고,
注+③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말하였다. “은殷 고종高宗 무정武丁에게 어진 아들 효기孝己가 있었는데 그 어미가 일찍 죽었다. 고종이 후처의 말에 미혹되어 내쫓아 그를 죽게 하니, 천하의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윤길보尹吉甫는 효자인
백기伯奇를 내쳤고,
注+④ ≪금조琴操≫에 말하였다. “윤길보尹吉甫는 주周나라 경卿이다. 백기伯奇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어미가 죽자 〈윤길보가〉 다시 장가들었다. 후처가 백규伯邽라는 아들을 낳고는 윤길보에게 백기를 참소하자, 이에 백기를 교야郊野로 내쫓았다. 주周 선왕宣王이 밖으로 나가 놀 때 윤길보가 따라갔는데, 백기가 이에 노래를 만들어 그 가사로 선왕을 감동시켰다. 선왕이 이를 듣고 ‘이는 효자孝子의 말이다.’라고 하자, 윤길보가 이에 교야에서 백기를 찾아 데려오고 후처를 활로 쏘아 죽였다.” 동중서董仲舒는 효자인
부기符起를 내쳤습니다. 이 세 분이야말로 고명한 분이었고, 이 세 아들이야말로 충신이자 효자였습니다.”
注
◦ 왕세무王世懋:≪후한서後漢書≫ 〈진식전陳寔傳〉을 살펴보건대, 살인을 한 자가 있자 같은 현縣의 양楊씨 성의 관리가 진식을 의심하였고 현縣에서 마침내 체포하여 고문했는데, 실체가 없어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로 이것과 〈내용이〉 부합하니, 어찌 정사正史가 또한 제齊나라 동쪽 야인野人의 말이겠는가. 또한 유효표劉孝標의 주석이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