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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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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司徒喪子注+① 蜀志曰 “許靖, 字文休, 汝南平輿人. 避亂交趾, 依太守士爕, 劉璋遣使招靖, 靖入蜀, 璋以爲廣漢太守. 先主爲漢中王, 拜太傅. 靖年逾七十, 愛樂人物, 誘納後進, 淸談不倦. 丞相諸葛亮, 皆爲之拜.” 董休昭注+② 蜀志曰 “董允, 字休昭, 南郡枝江人. 父和, 掌軍中郞將. 允秉心公亮, 丞相亮欲任以宮省之事, 遷侍中. 允事爲防制, 甚得匡救之理. 延熙中, 守尙書令.” 華陽國志曰 “蜀人以諸葛亮․蔣琬․費禕及允爲四相.” 與費文偉注+③ 蜀志曰 “費禕, 字文偉, 江夏鄳人. 遊學益土, 與汝南許叔龍․南郡董允齊名. 代蔣琬, 爲尙書令.” 欲共會其葬所 休昭 白其父掌軍하고 請車注+④ 蜀志曰 “董和, 字幼宰, 南郡枝江人. 劉璋時, 爲益州太守. 先主定蜀, 爲掌軍中郞將, 與武侯竝署大司馬府事, 獻可替否, 爲交歡. 和外牧殊域, 內幹機衡, 二十餘年, 死之日, 家無儋石之財. 亮敎與群下曰 ‘夫參署者, 集衆思, 廣忠益也, 若遠小嫌, 難相違覆, 曠闕損矣. 違覆而得中, 猶棄弊蹻而獲珠玉, 然人心苦不能盡. 惟徐元直, 處玆不惑, 又董幼宰, 參署七年, 事有不至, 至於十反, 來相啓告. 苟能慕元直之十一․幼宰之殷勤, 有忠於國, 則亮可少過矣.’”하니 掌軍 遣開後鹿車하여 給之한대 休昭 有難載之色이어늘 文偉 便從前先上이라
及至喪所하니 諸葛亮及諸貴人 悉集하고 車乘甚鮮한대 休昭 猶神色未泰어늘 文偉 晏然自若이라 持車人還 掌軍問之하여 知其如此하고 謂休昭曰
吾常疑汝於文偉 優劣未別也러니 自是 吾意了矣注+⑤ 優劣不在此.라하다


12-3 【허사도許司徒(허정許靖)의 아들(허흠許欽)이 죽자,注+①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허정전許靖傳〉에 말하였다. “허정은 문휴文休로, 여남汝南 평여平輿 사람이다. 교지交趾로 피난 가서 교지태수 에게 의지했는데, 이 사신을 파견하여 허정을 초빙하였다. 허정이 에 들어오자 유장이 그를 광한태수廣漢太守로 삼았다. 선주先主(유비劉備)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었을 때 그를 태부太傅에 제수하였다. 허정은 나이 일흔이 넘었으나 인재를 사랑하여 후배를 인도하고 받아들였으며, 고담준론을 나누면서 피곤해하지 않았다.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 등이 모두 그에게 절을 하였다.” 동휴소董休昭(동윤董允)가注+②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동윤전董允傳〉에 말하였다. “동윤은 휴소休昭로, 남군南郡 지강枝江 사람이다. 부친 동화董和장군중랑장掌軍中郞將을 역임하였다. 동윤은 마음가짐이 공명정대했기 때문에 승상 제갈양이 궁성宮省(궁중宮中)의 일을 맡기고자 하여 시중侍中으로 승진시켰다. 동윤은 일처리에 있어 사전에 방비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고,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잘못을〉 바로잡는 이치를 잘 터득하고 있었다. 〈후주〉 연희延熙 연간(238~257)에 수상서령守尙書令이 되었다.”
에 말하였다. “촉나라 사람들은 제갈양․비의費禕․동윤을 사상四相(네 명의 재상)이라고 하였다.”
비문위費文偉(비의費禕)와注+③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비의전費禕傳〉에 말하였다. “비의는 문위文偉로, 강하江夏 사람이다. 익주益州에 와서 공부하여 여남汝南허숙룡許叔龍, 남군南郡의 동윤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장완蔣琬을 대신하여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함께 그 장지葬地에 참석하고자 하였다. 동휴소가 부친 장군중랑장掌軍中郞將(동화董和)에게 아뢰고 수레를 요청하자,注+④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동화전董和傳〉에 말하였다. “동화는 유재幼宰로, 남군南郡 지강枝江 사람이다. 유장劉璋이 〈익주목益州牧이었을〉 때에 익주태수가 되었다. 선주先主(유비劉備)가 을 평정했을 때 장군중랑장將軍中郎將이 되어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諸葛亮)와 함께 대사마부大司馬府의 일을 처리했는데, 을 권장하고 을 바로잡아 함께 친밀한 벗이 되었다. 〈동화는〉 20여 년 동안 조정 밖에서는 먼 지역의 장관이 되고 조정에서는 기형機衡(중요 업무)을 담당하였으나, 죽는 날에 집에는 의 재물도 없었다. 제갈양이 모든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하였다. ‘관리가 된 자가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으면 충성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확장하게 된다. 만약 작은 혐의를 멀리하느라 을 어려워하면 직분을 잃어 손실이 있게 된다. 위복하여 타당함을 얻는 것은 헌 신짝을 버리고 주옥을 얻는 것과 같은데도 사람들의 마음은 괴롭게 여겨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서원직徐元直(서서徐庶)만이 이런 일에 처하여 미혹되지 않았고, 또 동유재(동화)는 관리가 된 7년 동안 사안에 완벽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심지어 열 번까지 반복하여 〈나에게 따지고 생각한 뒤에〉 나를 찾아와 보고하였다. 만일 서원직의 10분의 1을, 동유재의 정성스러움을 배워 국가에 충성할 수 있다면 나는 허물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장군중랑장이 뒤가 열려 있는 를 보내주었다. 동휴소는 타기 어려워하는 기색을 띠었지만 비문위는 즉시 앞쪽에서 먼저 올라탔다.
장지에 도착했을 때 제갈량諸葛亮과 여러 귀인들이 모두 모여 있고 〈그들의〉 수레가 매우 화려하였다. 동휴소는 여전히 신색神色(안색)이 편치 않았으나 비문위는 태연자약하였다. 수레를 몰고 갔던 사람이 돌아오자, 장군중랑장이 〈저간의 사정을〉 물어보아 이와 같았다는 것을 알고는 동휴소에게 말하였다.
“나는 항상 네가 비문위에 대해서 그 우열이 어떤지 의문을 갖고 판가름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나의 생각이 분명해졌다.”注+⑤ 〈동윤董允비의費禕의〉 우열은 이런 측면에 있지 않다.


역주
역주1 士爕(사섭) : 137~226. 蒼梧 廣信 사람으로, 字는 威彦이며, 三國시대 交州 일대에 근거를 둔 군벌이다.
역주2 劉璋 : 江夏 竟陵 사람으로, 字는 季玉이다. 한나라 宗室이자 군벌로, 益州牧 劉焉의 아들이며, 유언의 사망 이후 익주목을 계승하였다.
역주3 常璩의 ≪華陽國志≫ : 상거(291?~361?)는 蜀郡 江原 사람으로, 字가 道將이며, 東晉시대 사학가이다. ≪화양국지≫는 12권이며, 현존하는 지리지 가운데 가장 빠르고 완정한 것으로, 서남지역의 산천․역사․인물․민속에 관한 중요 자료를 싣고 있다.
역주4 蔣琬 : ?~246. 零陵 湘鄕 사람으로, 字는 公琰이다. 蜀(三國)나라의 재상으로, 諸葛亮․董允․費禕와 함께 ‘蜀汉四相’으로 불렸다.
역주5 儋石 : ‘담’은 작은 항아리[小甖]로, 2斛을 수용하는데, 한 사람이 메는 용량이다.(≪漢書≫ 〈蒯通傳〉 應劭․顔師古 주석)
역주6 違覆 : ≪世說音釋≫에서 “違는 이상하게 여겨 묻는 것이고, 覆은 반복하여 나에게 보고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반복하여 사리를 따지며 연구한다는 뜻으로, 상대의 뜻을 거스르는 한이 있어도 바른 도리를 찾기 위해 계속 공문이나 글을 주고받으면서 끝까지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7 鹿車 : 원래는 사슴이 끄는 작은 수레였으나, 이후 작은 수레를 이르는 말로 쓰였다.
역주8 (其)[共] : 저본에는 ‘其’로 되어 있으나, ≪三國志≫ 〈蜀志 董和傳〉에 의거하여 ‘共’으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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