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히지 못한〉 종이가 날리듯이 떨어지자 시종했던 신하들이 각자 그 이름을 확인하고 품 안에 넣었다. 오직
심전기沈佺期와
송지문宋之問 두 사람의 시만 내려오지 않았다.
注+③ ≪당시기사唐詩紀事≫에 말했다. “송지문宋之問은 자字가 연청延淸으로 분주汾州 사람이다. 심전기沈佺期와 유윤제劉允濟와 함께 장역지張易之에게 아첨하여 달라붙었는데, 〈장역지가〉 몰락하게 되자 농주참군瀧州參軍으로 좌천되었고 도망쳐 돌아왔다. 경룡景龍 연간(707~710)에 태평공주太平公主에게 아첨하며 섬기다가, 뒤에 안락공주安樂公主의 권세가 커지자 다시 가서는 영합하며 결탁하였다. 중종中宗이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기용하려고 했는데, 태평공주가 그가 뇌물 받은 것을 들추어내어 월주장사越州長史로 좌천되었다. 그가 지은 시는 경사京師까지 전해졌다. 예종睿宗이 즉위하고서 〈그가〉 간사하고 음흉하며 죄악이 많다고 하여 흠주欽州에 유배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심전기沈佺期는 자字가 운경雲卿으로 상주相州 사람이다. 급사중給事中과 고공랑考功郞에 제수되었는데, 뇌물을 받아 탄핵되었다가 〈조사가〉 채 끝나기 전에 마침 으로 환주驩州에 장기간 유배되었다. 얼마 후 태주록사참군台州錄事參軍으로 옮겨져 하러 왔다가 〈황제가〉 불러서 접견하고 수문전修文殿 직학사直學士에 제수되었다. 연회에서 〈황제를〉 시종할 때 농담을 했는데 황제가 기뻐하며 상아와 비단을 하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다.”
≪당서唐書≫에 말했다. “심전기는 글을 잘 지었는데 특히 칠언시七言詩에 뛰어났다. 송지문과 명성을 나란히 하여 당시 사람들이 ‘심송沈宋’으로 〈나란히〉 불렀다.” 다시 잠시 후 종이 하나가 떨어졌는데 바로 심전기의 시였다. 상관소용이 품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