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朱泚之亂注+① 唐書曰 “泚, 幽州昌平人. 以父資從軍, 代宗朝, 拜幽州盧龍節度使, 留京師. 涇原兵作亂, 奉泚爲主, 居白華殿, 自稱大秦皇帝. 官軍收復京師, 斬之.” 裴佶 與衣冠數人으로 佯爲奴하고 求出城한대 佶最寢陋하고 自稱甘草 門兵曰
此數子 定非人奴 如甘草者 不疑注+② 劉昫唐書曰 “裴佶, 字弘正, 裵耀卿之孫. 能屬文, 弱冠擧進士. 德宗南狩, 奔詣行在, 拜拾遺. 佶淸勁溫敏, 所交皆當時第一流, 與鄭餘慶特相友善. 餘慶行朋友之服, 縉紳美之.”라하다


24-48 【주체朱泚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注+① ≪구당서舊唐書≫ 〈주자열전朱泚列傳〉에 말하였다. “주체朱泚유주幽州 창평현昌平縣 사람이다. 부친(주회규朱懷珪)의 은음恩蔭으로 종군從軍하여 대종代宗 때에 유주노룡절도사幽州盧龍節度使에 제수되었는데, 〈태위太尉의 직함을 가지고〉 도성에 머물렀다. 〈덕종德宗 건중建中 4년(783)에〉 경원涇原 지역의 군사가 반란을 일으켜 주자를 주군으로 받들자, 〈그는〉 백화전白華殿에 머물면서 스스로 대진황제大秦皇帝라고 일컬었다. 관군官軍이 도성을 수복한 뒤에 그를 참수하였다.” 배길裴佶의관衣冠(관리) 몇 명과 함께 하인인 척하면서 성을 나가려고 했는데, 배길의 용모가 가장 못나고 자신을 ‘감초甘草’라고 불렀다. 성문의 군사가 말하였다.
“이 몇 명은 절대 남의 하인이 아니니, 감초 같은 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注+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 〈배길열전裴佶列傳〉에 말하였다. “배길裴佶홍정弘正으로, 의 손자이다. 글을 잘 짓고 약관의 나이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덕종德宗이 〈주체朱泚의 난을 피해〉 남쪽 〈봉천奉天〉으로 몽진했을 때에 에 달려가 습유拾遺에 제수되었다. 배길은 청렴하고 굳세며 온화하고 똑똑하고, 교제한 사람은 모두 당대의 일류 인사들이었는데, 과 특히 사이가 좋았다. 〈배길이 죽었을 때〉 정여경이 벗을 위한 상복을 입자 사대부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역주
역주1 裵耀卿 : 字는 煥之이고, 시호는 文獻이다. 唐 玄宗 때 濟州刺史․宣州刺史 등을 역임했는데 善政이 있었고, 尙書左僕射(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역주2 行在所 : 임금이 어떤 사유로 궁궐에서 나와 임시로 머무는 곳이다.
역주3 鄭餘慶 : 745~820. 唐 鄭州 滎陽縣 사람으로 字는 居業이고, 시호는 貞이다. 젊을 때 嚴震의 막교가 되고, 山南西道從事․殿中侍御史․兵部員外郞․翰林學士․工部侍郎 등을 역임하며, 이후에 中書侍郞으로서 재상에 임명되고, 同平章事․國子祭酒․河南尹․兵部尙書․太子少傅․山南西道節度使․太子少师․司空 등을 역임하고, 滎陽郡公에 봉해졌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