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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傅嘏는 ‘최고의 이치인 허무[
허승虛勝]’에
注+①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부하전傅嘏傳〉에 말하였다. “부하는 자字가 난석蘭石으로, 북지北地의 니양泥陽 사람이고, 부개자傅介子의 후손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하남윤河南尹과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부하가 일찍이 재주[재才]와 본성[성性]의 동이同異에 대해 담론했었는데, 종회鍾會가 그 내용을 모아서 논의하였다.”
≪부자傅子≫에 말하였다. “부하는 이미 정치에 통달하고 정도正道를 좋아하는 데다가 청담淸談의 논리에 대해 핵심을 체득하였다. 예를 들면 재주와 본성의 관계에 대한 담론에서 근원을 탐구해나간 것이 정밀하고 심오하니, 그의 수준에 이른 자가 드물었다. 사예교위司隷校尉 종회는 나이가 매우 젊었는데, 부하가 그를 지혜롭다고 여겨서 그와 교유하였다.” 대한 담론이 뛰어났고,
순찬荀粲은 담론할 때 ‘심오하고 현묘한 이치[
현원玄遠]’를 숭상했는데, 매번 함께 대화할 때마다 논쟁하면서 서로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럴 때마다〉
배기주裴冀州(
배휘裴徽)가 두 사람의 의미를 해석하고 피차간의 마음을 소통시켜 항상 두 사람의 마음이 모두 흡족하게 하고 피차간에 모두 즐겁게 하였다.
注+② 〈순찬별전荀粲別傳〉에 말하였다. “순찬荀粲이 태화太和 연간(366∼371) 초반에 서울에 가서 부하傅嘏와 담론을 벌였는데, 부하는 ‘사물의 명칭[명名]과 이치[이理]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 뛰어났고, 순찬은 ‘심오하고 현묘한 이치’를 숭상하였다. 그 종지宗旨는 비록 같았으나, 〈담론 중에〉 갑자기 의견이 어긋나 서로 만족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배휘裴徽가 피차간의 마음을 소통시키고 두 사람에게 각각의 논리를 해석해주면, 잠시 뒤에 순찬과 부하는 사이가 좋아졌다.”
에 말하였다. “ 배휘는 뛰어난 재주와 훌륭한 도량을 지니고, 현묘한 이치에 대한 담론을 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