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家門户
는 所謂
이니 自可隨流平進
이요 不須茍求
注+① 南史曰 “王騫, 字思寂, 太尉儉之子也. 性凝簡, 慕樂廣之爲人. 諸女子姪皆嬪王尙主, 輜輧塡咽, 非所欲也. 有田八十餘頃, 與諸宅及故舊共佃之, 常曰 ‘我不如鄭公業有田四百頃, 而食常不周.’ 以此爲愧. 仕至度支尙書, 加給事中.”라하다
20-15 【보補】 왕장사王長史(왕건王騫)는 더할 나위 없는 성품에 장중하고 소박하였으며 당시의 권문세가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한번은 조용히 자식들에게 말했다.
“
자연히 흐름을 따라 차근차근 나아가면 될 것이다. 구차하게 구할 것 없다.”
注+① ≪남사南史≫에 말했다. “왕건王騫은 자字가 사적思寂으로 태위太尉 왕검王儉의 아들이다. 성품이 장중하고 소박하였으며 악광樂廣의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그들이 인사하러 오느라〉 수레가 붐벼 혼잡하였는데 〈왕건은〉 이러한 것을 원치 않았다. 80여 경頃의 전답이 있었는데, 여러 집과 친구들과 공동으로 경작하였다. 항상 〈사람들에게〉 ‘나는 정공업鄭公業(정태鄭泰)이 전답 400을 가졌으면서도 먹을 밥이 늘 넉넉하지 못했던 것만 못하다.’라며 이를 부끄러워했다. 벼슬은 탁지상서度支尙書에 이르렀으며 급사중給事中을 더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