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韋氏孝友文學 有承慶․嗣立注+① 劉昫唐書曰 “韋承慶, 字延休. 嗣立, 承慶異母弟也. 父思謙, 則天朝納言. 母王氏遇承慶甚嚴, 每有杖罰, 嗣立必解衣請代, 母不聽, 輒私自杖. 母察知之, 漸加恩貸. 議者比王祥․王覽.”하고 邃音樂 有萬石注+② 劉昫唐書曰 “萬石, 韋挺之子. 有學業, 而善音律. 爲太常卿, 增損郊廟燕會樂調, 時以爲稱職.”하고 達禮儀 則叔夏注+③ 劉昫儒學傳曰 “韋叔夏, 左僕射安石兄也. 精通三禮, 官國子祭酒, 撰五禮要記.” 史才博識 有述注+④ 劉昫唐書曰 “述勒成國史一百十三卷, 事簡而記詳, 有良史才. 蕭頴士以爲譙周․陳壽之流. 述以儒術進, 當代宗仰, 而純厚長者, 澹於勢利. 聚書二萬卷, 皆自校定, 雖御府不逮也. 兼古今朝臣圖, 歴代知名人畫, 魏晉以來草隷眞跡數百卷, 古碑․古器․藥方․格式․錢譜․璽譜之類, 當代名公尺題, 無不畢備. 祿山之亂, 兩京陷賊, 玄宗幸蜀, 述抱國史藏於南山, 經籍資産焚剽殆盡, 述亦陷於賊庭.”이라
時趙冬曦注+⑤ 唐詩紀事曰 “趙冬曦, 定州人. 開元初, 監察御史, 坐事流岳州, 召還復官.”兄弟亦有美名注+⑥ 宋祁唐書曰 “冬曦兄夏日, 弟和璧․安貞․居貞․頤貞․彙貞, 皆擢進士第.”이러니 張燕公注+⑦ 劉昫唐書曰 “張說, 字道濟. 其先范陽人, 代居河東, 後徙洛陽. 弱冠對䇿, 授太子校書, 預修三教珠英. 開元中, 召說及禮官學士, 賜宴集賢殿, 授說集賢院學士. 封燕公.”嘗語人曰
韋․趙兄弟 人之杞梓注+⑧ 春秋傳曰 “晉大夫皆卿材也, 如杞梓․皮革.”이라하다


16-50 위씨韋氏 가운데 효성스럽고 우애있으며 문학文學에 뛰어난 사람으로는 위승경韋承慶위사립韋嗣立이 있고,注+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에 말했다. “위승경韋承慶연휴延休이고, 위사립韋嗣立은 위승경의 배다른 동생이다. 부친 위사겸韋思謙측천무후則天武后 때의 납언納言이다. 모친 왕씨王氏는 매우 엄하게 위승경을 대했다. 매를 치는 벌을 내릴 때마다 위사립은 옷을 풀어헤치고 〈자신이〉 대신 벌을 받겠다고 청하였는데, 모친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곧바로 몰래 자신을 매질하였다. 모친이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점차 〈위승경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평론하는 사람들은 〈형제를〉 에 견주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는 위만석韋萬石이 있고,注+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에 말했다. “위만석韋萬石위정韋挺의 아들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음률音律에 정통하였다. 이 되어 천지와 종묘에 지내는 제사와 연회燕會를 위한 음악과 곡조를 손질하니, 당시 사람들이 직임에 어울린다고 하였다.” 예의禮儀에 통달한 사람으로는 위숙하韋叔夏가 있고,注+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 〈유학전儒學傳〉에 말했다. “위숙하韋叔夏좌복야左僕射 위안석韋安石의 형이다. 에 정통했고 관직은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오례요기五禮要記≫를 지었다.” 사서史書를 편찬할 재주가 있고 박식한 사람으로는 위술韋述이 있었다.注+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에 말했다. “위술韋述은 ≪국사國史≫ 113권을 정리하여 완성했는데 일은 간략하되 기록은 상세하니, 사관으로서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소영사蕭穎士초주譙周진수陳壽 같은 부류라고 하였다. 위술은 유학儒學으로 벼슬에 나아가 당대의 사람들로부터 추앙받았고 순후純厚장자長者로서 권세와 이익을 탐내지 않았다. 책을 2만권 모으고 모두 직접 교정하여 바로잡았는데, 황실의 서고도 〈그의 장서에는〉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고금古今조신朝臣들의 그림, 역대 유명 인물들의 화상, 위진魏晉 이후의 초서 및 예서의 진적眞跡 수백 권, 고비古碑고기古器약방藥方격식格式전보錢譜새보璽譜 부류, 당대當代 명공名公들의 서신 등을 아울러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으로 두 서울(장안長安낙양洛陽)이 반란군에게 함락되어 현종玄宗땅으로 거둥하자 위술은 국가의 사서史書를 가슴에 품고서 남산南山에 숨겼다. 경적經籍들과 자산資産은 불타고 노략질당해 거의 없어지고 위술도 반란군의 조정에 억류되었다.”
당시 조동희趙冬曦注+에 말했다. “조동희趙冬曦정주定州 사람이다.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연간(713~741) 초에 감찰어사監察御史였는데 사건에 연좌되어 악주岳州에 유배되었다가 소환되어 복관復官되었다.” 형제兄弟도 훌륭하다는 명성이 있었다.注+송기宋祁의 ≪신당서新唐書≫에 말했다. “조동희趙冬曦는 형 조하일趙夏日과 동생 조화벽趙和璧조안정趙安貞조거정趙居貞조이정趙頤貞조휘정趙彙貞이 모두 진사進士에 급재했다.” 장연공張燕公(장열張說)이注+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에 말했다. “장열張說도제道濟이다. 그의 선조는 범양范陽 사람으로 대대로 하동河東에 살다가 나중에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여〉 대책對䇿으로 급제하여 태자교서太子校書에 제수되었다.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개원開元 연간(713~741)에 〈현종이〉 장열과 예관학사禮官學士를 불러 집현전集賢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장열을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에 제수하였다.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졌다.” 한번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위씨와 조씨 형제들은 사람들 가운데 소태나무()와 가래나무()와 같은 훌륭한 재목이다.”注+⑧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말했다.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에는 실려 있지 않고 ≪何氏語林≫에 실려 있는 것에 의거하여 ‘補’자를 보충하였다.
역주2 王祥과 王覽 형제 : 晉나라 때의 배다른 형제이다. 형인 왕상은 일찍 生母를 여의었는데 계모의 구박과 홀대에도 효성스러운 태도를 잃지 않고 효도로 대하였고, 동생 왕람은 왕상이 모친에게 매를 맞을 때마다 형을 감쌌다. 후에 왕상을 시기한 모친이 독이 든 술을 왕상에게 주자 왕람이 술잔을 뺏어 마시려고 하였고 모친은 이를 급히 막는 일이 있었다. 이 일로 모친은 마음을 바꾸어 먹게 되었다.(≪晉書≫ 〈王祥王覽傳〉)
역주3 太常卿 : 宗廟의 儀禮를 관장하는 太常寺의 長官이다.
역주4 세 禮書 : 유가의 경전인 ≪周禮≫․≪儀禮≫․≪禮記≫를 말한다.
역주5 ≪唐詩紀事≫ : 唐代의 詩歌 자료를 모은 것으로 1,150여 명의 시인을 수록했으며 모두 81권이다. 宋代의 計有功이 점차 실전되어가는 당대 작가의 작품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하였다.
역주6 ≪三教珠英≫ : 唐나라 經歷 2년(699)에 則天武后의 명으로 편찬된 詩歌選集의 類書로 1,300권에 목록이 13권이었다. 후에 ≪海内珠英≫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宋代에 겨우 3권만 남았다가 현재는 모두 산실되었다.
역주7 晉나라의……같다 : ≪春秋左氏傳≫ 襄公 26년에는 “晉나라의 大夫는 모두 현명하여 卿이 될만한 재목이니 楚나라에서 나는 소태나무(杞)와 가래나무(梓), 그리고 皮革이 진나라로 가는 것과 같다.[其大夫則賢 皆卿材也 如杞梓皮革 自楚往也]”로 되어 있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