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씨韋氏 가운데 효성스럽고 우애있으며 문학文學에 뛰어난 사람으로는 위승경韋承慶과 위사립韋嗣立이 있고,注+① 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에 말했다. “위승경韋承慶은 자字가 연휴延休이고, 위사립韋嗣立은 위승경의 배다른 동생이다. 부친 위사겸韋思謙은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의 납언納言이다. 모친 왕씨王氏는 매우 엄하게 위승경을 대했다. 매를 치는 벌을 내릴 때마다 위사립은 옷을 풀어헤치고 〈자신이〉 대신 벌을 받겠다고 청하였는데, 모친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곧바로 몰래 자신을 매질하였다. 모친이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점차 〈위승경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평론하는 사람들은 〈형제를〉
이 되어 천지와 종묘에 지내는 제사와 연회燕會를 위한 음악과 곡조를 손질하니, 당시 사람들이 직임에 어울린다고 하였다.”예의禮儀에 통달한 사람으로는 위숙하韋叔夏가 있고,注+③ 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 〈유학전儒學傳〉에 말했다. “위숙하韋叔夏는 좌복야左僕射위안석韋安石의 형이다.
에 정통했고 관직은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오례요기五禮要記≫를 지었다.”사서史書를 편찬할 재주가 있고 박식한 사람으로는 위술韋述이 있었다.注+④ 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에 말했다. “위술韋述은 ≪국사國史≫ 113권을 정리하여 완성했는데 일은 간략하되 기록은 상세하니, 사관으로서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소영사蕭穎士가 초주譙周와 진수陳壽 같은 부류라고 하였다. 위술은 유학儒學으로 벼슬에 나아가 당대의 사람들로부터 추앙받았고 순후純厚한 장자長者로서 권세와 이익을 탐내지 않았다. 책을 2만권 모으고 모두 직접 교정하여 바로잡았는데, 황실의 서고도 〈그의 장서에는〉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고금古今의 조신朝臣들의 그림, 역대 유명 인물들의 화상, 위진魏晉 이후의 초서 및 예서의 진적眞跡 수백 권, 고비古碑․고기古器․약방藥方․격식格式․전보錢譜․새보璽譜 부류, 당대當代명공名公들의 서신 등을 아울러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으로 두 서울(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이 반란군에게 함락되어 현종玄宗이 촉蜀땅으로 거둥하자 위술은 국가의 사서史書를 가슴에 품고서 남산南山에 숨겼다. 경적經籍들과 자산資産은 불타고 노략질당해 거의 없어지고 위술도 반란군의 조정에 억류되었다.”
에 말했다. “조동희趙冬曦는 정주定州 사람이다.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연간(713~741) 초에 감찰어사監察御史였는데 사건에 연좌되어 악주岳州에 유배되었다가 소환되어 복관復官되었다.”형제兄弟도 훌륭하다는 명성이 있었다.注+⑥ 송기宋祁의 ≪신당서新唐書≫에 말했다. “조동희趙冬曦는 형 조하일趙夏日과 동생 조화벽趙和璧․조안정趙安貞․조거정趙居貞․조이정趙頤貞․조휘정趙彙貞이 모두 진사進士에 급재했다.”장연공張燕公(장열張說)이注+⑦ 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에 말했다. “장열張說은 자字가 도제道濟이다. 그의 선조는 범양范陽 사람으로 대대로 하동河東에 살다가 나중에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여〉 대책對䇿으로 급제하여 태자교서太子校書에 제수되었다.
역주1【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에는 실려 있지 않고 ≪何氏語林≫에 실려 있는 것에 의거하여 ‘補’자를 보충하였다.
역주2王祥과 王覽 형제 :
晉나라 때의 배다른 형제이다. 형인 왕상은 일찍 生母를 여의었는데 계모의 구박과 홀대에도 효성스러운 태도를 잃지 않고 효도로 대하였고, 동생 왕람은 왕상이 모친에게 매를 맞을 때마다 형을 감쌌다. 후에 왕상을 시기한 모친이 독이 든 술을 왕상에게 주자 왕람이 술잔을 뺏어 마시려고 하였고 모친은 이를 급히 막는 일이 있었다. 이 일로 모친은 마음을 바꾸어 먹게 되었다.(≪晉書≫ 〈王祥王覽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