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初中
에 有甲乙疑論
注+① 殷基通語曰 “司馬懿誅曹爽, 費褘設甲乙論. 甲以爲 ‘曹爽兄弟, 凡品庸人, 以宗子枝屬得蒙顧命, 而驕奢僭逸, 交非其人, 私樹朋黨, 謀以亂國. 懿奮誅戮, 一朝殄盡, 此所以副士民之望也.’ 乙以爲 ‘懿感曹仲附己不一, 豈爽與相干. 事勢不專, 以此陰成疵瑕. 初無忠告侃爾之訓, 一朝屠戮, 讒其不意, 豈大人經國篤本之事乎. 若爽信有謀主之心, 大逆已搆, 而發兵之日, 更以芳委爽兄弟. 懿父子從後閉門擧兵, 蹙而向芳, 豈忠臣爲君深謀之謂乎. 以此推之, 爽無大惡, 明矣. 若懿以爽奢僭, 廢之可也. 滅其尺口, 被以不義, 絶子丹血食, 及何晏, 魏之親甥, 亦與同戮, 爲僭濫不當矣.’”하니 荀仲茂
注+② 荀氏家傳曰 “荀閎, 字仲茂, 諶之子, 爲太子文學掾.”와 鍾元常
注+③ 魏志曰 “繇, 字元常, 潁川長社人. 家貧好學, 歷大理․相國, 遷太傅.”과 王景興
과 袁曜卿
注+④ 魏志曰 “袁渙, 字曜卿, 陳郡扶樂人. 父滂, 漢司徒. 渙避地江淮, 爲袁術所命. 呂布擊術於阜陵, 渙往從之, 爲布所拘留.” 袁氏世紀曰 “布之破也, 陳群父子亦在布軍. 見太祖皆拜, 渙獨高揖, 太祖甚嚴憚之. 時太祖給衆官車各數乘, 使取布軍中物, 衆人皆重載, 渙取書數百卷而已.”이 議各不同
이라 文帝謂元常曰
袁王은 國士요 更爲唇齒어니와 荀閎은 勁悍하고 往來銳師하니 眞君侯之勍敵이요 左右之深憂라하다
8-8
〈
위진魏晉시대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황초黃初 연간(220∼226)에
이 있었는데,
注+① 에 말하였다. “〈위魏나라의〉 사마의司馬懿가 조상曹爽을 주살하자, 〈촉蜀나라 강하江夏 사람〉 비위費褘(비문위費文偉)가 갑을론甲乙論을 펼쳤다. 갑甲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그런데 그들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분수에 넘치고 방종하며, 교제하는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아니며, 개인적으로 붕당朋黨을 세우고 반란을 도모해 국가를 어지럽혔다. 사마의가 분격하여 그들을 도륙하여 하루아침에 모두 죽였으니, 이는 백성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을乙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사마의는 이 자기를 따르는 것이 한결같지 않다고 유감스러워했으니 어찌 조상이 역모에 관여했겠는가. 〈사마의는〉 상황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자 이로써 은밀히 〈조상의〉 허물을 만들어냈다. 애초에 부드럽게 충고하는 가르침도 없이 하루아침에 도륙하고 어찌 대인이 국가를 경영하고 근본을 돈독히 하는 일이겠는가. 만약 진실로 조상이 군주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어 대역부도한 짓을 이미 꾸몄다면 〈사마의가〉 거병하는 날에 다시 소제少帝 조방曹芳을 조상曹爽 형제에게 맡겼겠는가. 사마의 부자는 〈조상 형제가 조방을〉 수행하도록 조치한 뒤에 궁문을 닫고 군대를 일으켜 압박하면서 조방을 향해 갔으니, 어찌 충신이 군주를 위해 심도 있게 계획했다고 하겠는가. 이로써 추론한다면 조상에게 대악大惡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사마의가 조상의 사치와 참람을 근거로 관직에서 쫒아냈다면 괜찮다. 그러나 갓난아이까지 죽이고 조상에게 불의不義의 죄명을 뒤집어 씌워 그의 부친 자단子丹(조진曹眞)의 혈식血食(제사)을 끊어버리며, 까지 그들과 함께 죽였으니, 이는 참람하여 옳지 않은 짓이다.’” 순중무荀仲茂(
순굉荀閎)․
注+② 의 〈순씨가전荀氏家傳〉에 말하였다. “순굉荀閎은 자字가 중무仲茂로, 순심荀諶의 아들이고, 태자太子의 문학연文學掾을 역임하였다.”종원상鍾元常(
종요鍾繇)․
注+③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종요전鍾繇傳〉에 말하였다. “종요는 자字가 원상元常으로, 영천潁川의 장사長社 사람이다. 집이 가난했으나 배움을 좋아하였고, 대리大理와 상국相國을 역임하고 태부太傅로 전직되었다.”왕경흥王景興(
왕랑王朗)․
원요경袁曜卿(
원환袁渙)의
注+④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원환전袁渙傳〉에 말하였다. “원환은 자字가 요경曜卿으로, 진군陳郡의 부락扶樂 사람이다. 부친 원방袁滂은 한漢나라의 사도司徒를 역임하였다. 원환이 강회江淮지역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 원술袁術에 의해 임용되었다. 여포呂布가 부릉阜陵에서 원술을 공격할 때 원환이 〈원술을〉 따라갔다가 여포에게 잡혀 머물게 되었다.”
≪원씨세기袁氏世紀≫에 말하였다. “여포가 〈조조曹操에 의해〉 격파당했을 때 진군陳群 부자도 여포의 군중軍中에 있었다. 그들이 태조(조조)를 만났을 때 모두 절을 올렸지만, 원환만 유독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읍揖을 하고 〈절을 하지 않으니〉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고 꺼렸다. 당시에 태조가 여러 관리들에게 각각 수레 몇 대씩을 주면서 여포의 군중에 있는 재물을 가져가라고 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재물을〉 무겁게 실어 갔으나 원환은 서책 수백 권만 가지고 갔을 뿐이었다.” 의론이 각각 달랐다.
문제文帝가 종원상에게 말하였다.
위魏 문제文帝(조비曹丕)
“원요경과 왕경흥은 국사國士이고, 또 나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소. 그러나 순굉은 굳세고 사나우며 날랜 군사를 데리고 왕래하니, 정말 군후君侯에게 있어 강한 적이고 지근거리의 깊은 근심거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