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伏波
가 嘗有疾
注+① 范曄後漢書曰 “馬援, 字文淵, 扶風茂陵人. 曾祖父通, 封重合侯, 坐事誅, 故再世不顯. 援年十二而孤, 少有大志. 嘗曰 ‘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因處田牧, 至有牛馬羊數千頭․穀數萬斛. 旣而歎曰 ‘凡殖貨財産, 貴能賑施也, 否則守錢虜耳.’ 乃盡散以班昆弟故舊, 身衣羊裘皮袴. 兄子嚴․敦, 竝喜譏議, 而通俠客, 援在交趾, 以書誡之. 建武四年, 隗囂使奉書洛陽, 歸身漢朝. 累立戰功, 拜伏波將軍, 封新息侯.”한대 梁松
이 來候之
하여 獨拜床下
어늘 不答
이라 諸子問曰
我乃松父友
니 雖貴
나 何得失其序
注+② 後漢書曰 “梁松, 字伯孫, 安定烏氏人, 梁統子. 少爲郞, 尙光武女舞陰長公主.”리오하다
10-3 【
보補】
마복파馬伏波(
마원馬援)가 병이 든 적이 있었는데,
注+①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마원렬전馬援列傳〉에 말하였다. “마원은 자字가 문연文淵으로, 부풍扶風 무릉茂陵 사람이다. 증조부 은 중합후重合侯에 봉해졌는데,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두 세대 동안 현달하지 못하였다. 마원은 12세에 부친을 여의었으나,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한번은 ‘사나이가 뜻을 세웠으면 곤궁할수록 더욱 굳건해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씩씩해야 한다.’ 하고는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여 수천 마리의 소․말․양과 수만 곡斛의 곡물을 소유하는 데에 이르렀다. 얼마 있다가 탄식하면서 ‘재산을 증식하는 모든 경우에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전노일 뿐이다.’ 하고는 〈소유한 재산을〉 모두 베풀어 형제와 벗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양가죽 웃옷과 가죽 바지를 입었다. 형의 아들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 모두 풍자와 비난을 좋아하고 협객과 사귀니, 마원이 교지交趾에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 훈계하였다. 〈한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4년(28)에 가 〈마원에게〉 편지를 지니고 낙양洛陽에 가서 〈광무제를 배알하게 했는데, 마원은〉 한나라 조정에 귀순하였다. 〈그 후에〉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워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제수되고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졌다.” 양송梁松이 병문안을 와서 침상 아래에서
했으나, 〈마복파가〉 답례하지 않았다. 여러 아들이 물었다.
“황제의 사위는 신분이 높고 권력이 막중하니, 어찌 답례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복파가 말하였다.
마원馬援
“나는 양송의 부친의 벗이니, 비록 〈그가〉 존귀하더라도 어찌 〈
장유長幼의〉 순서를 잃을 수 있겠느냐.”
注+② ≪후한서後漢書≫ 〈양송열전梁松列傳〉에 말하였다. “양송은 자字가 백손伯孫으로, 안정安定 오지烏氏 사람이며, 의 아들이다. 젊을 때 낭郞이 되었고, 광무제光武帝의 딸 에게 장가 들었다.”
注
◦ 이지李贄:〈양송梁松이 절을〉 엉망으로 했던 것이다.
注
◦ 이지李贄:〈원주 ①의 “사나이가 뜻을 세웠으면 곤궁할수록 더욱 굳건해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씩씩해야 한다.”는 말은〉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