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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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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貴鄕公하니 內外諠譁注+① 魏志曰 “高貴鄕公, 諱髦, 字彦, 文帝孫, 東海定王霖之子也. 初封郯縣高貴鄕公, 好學夙成. 齊王廢, 群臣迎之, 卽皇帝位.” 漢晉春秋曰 “自曹芳事後, 魏人省徹宿衛, 無復鎧甲, 諸門戎兵, 老弱而已. 曹髦見威權日去, 不勝其忿, 召侍中王沈․尙書王經․散騎常侍王業, 謂曰 ‘司馬昭之心, 路人所知也. 吾不能坐受廢辱, 今日當與卿自出討之.’ 王經諫, 不聽, 乃出懷中板令投地, 曰 ‘行之決矣. 正使死, 何所恨? 況不必死耶?’ 於是入白太后. 沈․業奔走告昭, 昭爲之備. 髦遂率僮僕數百, 鼓譟而出. 昭弟屯騎校尉伷入, 遇髦於東止車門, 左右訶之, 伷衆奔走. 中護軍賈充又逆髦, 戰於南闕下, 髦自用劒, 衆欲退. 太子舍人成濟問充曰 ‘事急矣, 當云何?’ 充曰 ‘公畜汝等, 正爲今日, 今日之事, 無所問也.’ 濟卽前刺髦, 刃出於背.” 魏氏春秋曰 “帝將誅大將軍, 詔有司, 復進位相國, 加九錫. 帝夜自將冗從僕射李昭․黃門從官焦伯等, 下陵雲臺, 鎧仗授兵, 欲因際會遣使, 自出致討, 會雨而却. 明日遂見王經等, 出黃素詔於懷曰 ‘是可忍也, 孰不可忍, 今當決行此事.’ 帝遂拔劒升輦, 率殿中宿衛․蒼頭․官僮, 擊戰鼓, 出雲龍門. 賈充自外而入, 帝師潰散, 帝猶稱天子, 手劒奮擊, 衆莫敢逼. 充率厲將士, 騎督成倅弟濟, 以矛進, 帝崩於師, 時暴雨雷電晦冥.” 司馬文王 問侍中陳泰曰注+② 魏志曰 “泰, 字玄伯, 司空群之子也.”
何以靜之오하니
泰云
惟殺賈充하여 以謝天下注+③ 晉諸公贊曰 “充, 字公閭, 襄陵人. 父逵, 魏豫州刺史. 充, 起家爲尙書, 遷廷尉, 晉受禪, 封魯郡公.”니이다하다
文王曰
可復下此不아하니
對曰
但見其上이요 未見其下注+④ 干寶晉紀曰 “高貴鄕公之殺, 司馬文王召朝臣, 謀其故, 太常陳泰不至. 使其舅荀顗召之, 告以可不, 泰曰 ‘世之論者, 以泰方於舅, 今舅不如泰也.’ 子弟․內外, 咸共逼之, 垂涕而入. 文王待之曲室, 謂曰 ‘玄伯, 卿何以處我?’ 對曰 ‘可誅賈充, 以謝天下.’ 文王曰 ‘爲吾更思其次.’ 泰曰 ‘惟有進於此, 不知其次.’ 文王乃止.” 漢晉春秋曰 “曹髦之薨, 司馬昭聞之, 自投於地, 曰 ‘天下謂我何?’ 於是召百官, 議其事. 昭垂涕問陳泰曰 ‘何以居我?’ 泰曰 ‘公光輔數世, 功蓋天下, 謂當竝迹古人, 垂美於後. 一旦有殺君之事, 不亦惜乎? 速斬賈充, 猶可以自明也.’ 昭曰 ‘公閭, 不可得殺也. 卿更思餘計.’ 泰厲聲曰 ‘意惟有進於此耳, 餘無足委者也.’ 歸而自殺.” 魏氏春秋曰 “泰勸大將軍誅賈充, 大將軍曰 ‘卿更思其他.’ 泰曰 ‘豈可使泰復發後言?’ 遂嘔血死.”니이다하다
【頭註】
王云 “千載凜凜, 陳群有慚德矣.”
應登云 “充親弑魏帝.”
王云 “合數說, 以實玄伯之正.”
劉云 “眞方正之目也, 神志凜然.”
李云 “老賊.”


10-12 고귀향공高貴鄕公(조모曹髦)이 세상을 떠나니, 조정이나 재야나 〈모두〉 소란스러웠다.注+①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삼소제기三少帝紀〉에 말하였다. “고귀향공高貴鄕公이고 언사彦士로, (삼국三國) 문제文帝(조비曹丕)의 손자이자 동해정왕東海定王 의 아들이다. 처음에 담현고귀향공郯縣高貴鄕公에 봉해졌고,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 완숙해졌다. 이 폐위되자 모든 신하가 그를 맞이하여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에 말하였다 “조방曹芳의 〈폐위〉 사건 이후에 나라는 〈궁중의〉 숙위병宿衛兵을 줄이고 더 이상 갑옷을 입지 못하게 하며, 모든 궁문에 배치된 군병도 노약자들뿐이었다. 조모曹髦는 〈위나라의〉 위세와 권력이 나날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시중侍中 상서尙書 산기상시散騎常侍 왕업王業을 불러 ‘사마소司馬昭의 〈찬탈하려는〉 마음은 행인들도 아는 바입니다. 나는 앉아서 폐위되는 치욕을 당할 수 없으니 오늘 마땅히 그대들과 함께 직접 나가서 그를 토벌해야겠소.’ 하였다. 왕경이 〈안 된다고〉 간했으나 듣지 않고, 마침내 가슴속에 품고 있던 판령板令(조령詔令)을 꺼내 땅에 내던지면서 ‘거행하는 것은 결정되었소. 설령 죽더라도 무엇이 한스럽겠소. 게다가 반드시 죽는다고도 할 수 없소.’ 하였다. 이에 〈태후궁太后宮에〉 들어가 〈모친인〉 태후(명제明帝 조예曹叡의 비 곽황후郭皇后)에게 아뢰었다. 왕침과 왕업이 다급히 달려가 사마소에게 고발하니 사마소가 그에 대해 방비하였다. 조모가 마침내 동복僮僕 수백 명을 거느리고 요란히 북을 울리면서 출병하였다. 사마소의 아우인 둔기교위屯騎校尉 가 〈궁궐로〉 들어가다가 동쪽 에서 조모를 만났는데, 〈조모의〉 좌우가 그를 꾸짖자 사마주의 무리들이 다급히 달아났다. 중호군中護軍 가충賈充이 또 조모를 맞이하여 남쪽 궐문 아래에서 싸웠는데, 조모가 직접 칼을 휘두르자 〈가충의〉 무리들이 물러서려 하였다. 태자사인太子舍人 성제成濟가 가충에게 ‘사태가 다급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으니, 가충이 ‘공(사마소)께서 너희들을 기른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니, 오늘의 일은 물을 바가 없다.’ 하자, 성제가 즉시 앞으로 나아가 조모를 찔렀는데 그 칼날이 등으로 나왔다.”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말하였다. “황제(조모)가 장차 대장군(사마소司馬昭)을 죽이기 위하여 유사有司(담당 관리)에게 조서를 내려 다시 〈그의〉 지위를 상국相國으로 승진시키고 을 수여하려 하였다. 황제가 밤에 용종복야冗從僕射 이소李昭황문종관黃門從官 초백焦伯 등을 직접 거느리고 를 내려와 〈호위부대에게〉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주고는, 〈수여식에 모일 신하들의〉 모임을 기회로 〈그를 맞이하는〉 사신을 파견하고 〈그가 오면〉 직접 출병하여 토벌하려고 했으나, 마침 비가 내려 〈수여식이〉 연기되었다. 다음날 결국 왕경 등을 만나 품속에서 를 꺼내면서 지금 마땅히 이 일(사마소 토벌)을 결행해야 하오.’ 하였다. 황제가 마침내 칼을 뽑아 들고 수레에 오른 뒤에 궐내의 숙위병과 을 거느리고 전고戰鼓를 울리면서 을 나섰다. 가충이 〈궁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자 황제의 군대가 궤멸되어 흩어졌는데, 황제는 여전히 천자라고 외치면서 손수 검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니 〈가충의〉 병사가 감히 다가서지 못하였다. 가충이 솔선하여 장병들을 독려하니, 의 아우 성제가 창을 들고 돌진하여 황제는 전란 속에서 붕어하였다. 그때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깜깜해졌다.”
사마문왕司馬文王(사마소司馬昭)이 시중侍中 진태陳泰에게 물었다.注+②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진태전陳泰傳〉에 말하였다. “진태는 현백玄伯으로, 사공司空 의 아들이다.”
“어떻게 하면 진정시킬 수 있겠소?”
진태가 말하였다.
“단지 가충賈充을 죽임으로써 천하에 사죄할 뿐입니다”注+에 말하였다. “가충賈充공려公閭로, 양릉襄陵 사람이다. 부친 가규賈逵(삼국三國)나라에서 예주자사豫州刺史를 역임하였다. 가충은 상서尙書에 기용되고 정위廷尉로 승진하였고, 나라가 〈위나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은 뒤에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졌다.”
사마문왕이 말하였다.
“그보다 조금 낮출 수 있겠소?”
〈진태가〉 대답하였다.
“다만 그 이상(군주를 시해한 죄)을 알 뿐, 그 이하는 알지 못합니다.”注+간보干寶의 ≪진기晉紀≫에 말하였다. “고귀향공高貴鄕公(조모曹髦)이 살해된 뒤에 사마문왕司馬文王(사마소)이 조정의 신료들을 불러 그 대책을 논의했는데, 태상太常 진태陳泰가 오지 않았다. 그의 외숙부 에게 그를 불러 참석 여부를 물어보게 하니, 진태가 ‘세상의 논자들은 저를 외숙부에게 견주는데, ’ 하였다. 자제들과 내외의 친족들이 모두 함께 〈참석하라고〉 강요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조정에 들어갔다. 사마문왕이 곡실曲室(밀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현백玄伯(진태)이여, 그대는 나에게 ’ 하니, 〈진태가〉 ‘가충賈充을 죽임으로써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 대답하였다. 사마문왕이 ‘나를 위하여 그 다음 방책을 다시 생각해주시오.’ 하니, 진태가 ‘단지 이보다 더 한 것이 있을 뿐, 그 다음 방책은 모르겠습니다.’ 대답하자, 사마문왕이 그제야 〈질문을〉 멈추었다.”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에 말하였다 “조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사마소가 듣고는 자신의 몸을 땅에 내던지면서 ‘천하가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백관을 불러 그 대책을 논의하였다. 사마소가 눈물을 흘리면서 진태에게 ‘나에게 어떤 〈해결〉 방안을 주겠소?’ 하니, 진태가 ‘공께서는 다방면으로 몇 세대를 보좌하여 공적이 천하를 뒤덮으니, 옛날 현인과 자취를 함께하고 후대에 훌륭함이 전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군주를 시해한 사건이 발생했으니 또한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속히 가충을 참수한다면 그런대로 스스로를 해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소가 ‘공려公閭(가충)는 죽일 수 없소. 그대는 다른 계책을 다시 생각해주시오.’ 하니, 진태가 언성을 높이면서 ‘생각건대, 단지 이보다 더 한 것이 있을 뿐, 나머지는 권할 만한 계책이 없습니다.’ 하고는 〈집에〉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말하였다. “진태가 대장군(사마소)에게 가충을 죽이라고 권하니, 대장군이 ‘그대는 그 이외의 방책을 다시 생각해주시오.’ 하자, 진태가 ‘어찌 저에게 다시 뒷말을 하도록 하십니까?’ 하고는 마침내 피를 토하고 죽었다.”
두주頭註
왕세무王世懋:〈진태陳泰의 언행은〉 천년토록 늠름하니, 〈진태의 부친〉
유응등劉應登:〈성제成濟가 직접 위제魏帝를 찔렀으나〉 가충賈充이 직접 나라 황제를 시해한 셈이다.
왕세무王世懋:여러 설명을 취합하여 현백玄伯(진태陳泰)이 올바름을 실증하였다.
유신옹劉辰翁:〈이 내용은〉 참으로 〈방정方正〉의 항목에 걸맞으니, 정신과 의지가 늠름하다.
이지李贄:〈사마소司馬昭는〉 도둑놈이다.


역주
역주1 曹霖 : ?~251. 沛國 譙縣 사람으로, 魏(三國)나라의 종실이며, 武帝 曹操의 손자이자 文帝 曹丕의 아들이다.
역주2 齊王(曹芳) : 232~274. 魏(三國)나라 明帝(曺叡)의 양자가 되어 뒤를 이었는데, 재위 15년 만에 司馬師에게 폐위되어 齊王이 되었다.
역주3 習鑿齒의 ≪漢晉春秋≫ : 습착치(317~384)는 襄陽 사람으로, 字는 彦威이다. 桓温의 從事․西曹主簿가 되었는데, 환온의 簒位 계획에 반대하여 户曹參軍으로 좌천되었고, 이후에 滎陽太守를 역임하였다. 그는 玄學․佛學․史學에 정통하였고, 저서로 ≪漢晉春秋≫, ≪襄陽耆舊記≫, ≪逸人高士傳≫, ≪習鑿齒集≫ 등이 있다. ≪한진춘추≫는 漢 光武帝로부터 晉 愍帝에 이르는 281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했는데, 蜀漢을 정통으로 인정하여 魏나라를 배제하고 진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했다고 하였다.
역주4 王沈 : ?~266. 字는 處道로, 魏晉시대의 대신이며 사학가이다. 東漢시대 護匈中郞將 王柔의 손자이자 東郡太守 王幾의 아들이며 司空 王昶의 조카이다.
역주5 王經 : ?~260. 冀州 淸河郡 사람으로, 字는 彦緯이다. 농민 출신으로서 魏(三國)나라 江夏太守와 雍州刺史를 역임하였다.
역주6 司馬伷(사마주) : 227~283. 河內 溫 사람으로, 字는 子將이다. 晉 宣帝(司馬懿)의 셋째 아들로, 伏太妃가 낳았고 瑯琊王에 봉해졌다. 景帝(司馬師)와 文帝(司馬昭)의 이복동생이자 武帝(司馬炎)의 숙부이다.
역주7 止車門 : 漢나라 궁궐의 司馬門으로, 이 문에 이르면 太子나 諸王도 모두 수레에서 내려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일컬은 것이다.
역주8 九錫 : 천자가 특별한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아홉 가지 은전으로, 車馬․衣服․樂器․朱戶․納陛(中陛로 올라갈 수 있음)․虎賁(從者 1백 명)․弓矢․鈇鉞․秬鬯(검은 기장과 향초를 섞어 빚은 술)이다.(≪春秋公羊傳≫ 莊公 元年)
역주9 陵雲臺 : 魏(三國) 文帝(曹丕)가 黃初 2년(221) 洛陽城에 건축한 누대로, 魏晉시대부터 北魏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건축물인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역주10 黃素詔 : 제왕의 詔書를 이른다. 조서 내용을 누런 비단에 기록했기 때문에 이렇게 일컬은 것이다.
역주11 이……못하겠소 : 원문의 ‘是可忍也 孰不可忍’은 ≪論語≫ 〈八佾〉에 보이는 구절이다.
역주12 蒼頭 : 奴僕을 이른다. 漢나라 때 奴僕들이 짚은 푸른색 베로 머리를 감쌌기 때문에 이렇게 일컬은 것이다. ≪史記≫ 〈蘇秦列傳〉의 ‘창두’ 주석에 “푸른 두건으로 머리를 싸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한다.” 하였다.
역주13 官僮 : 관청에 소속되어 심부름하고 잡역을 담당한 사람이다.
역주14 雲龍門 : 魏(三國) 明帝(曹叡)가 지은 洛陽宮의 서문이다.
역주15 騎督 : 騎兵을 거느리고 독려하는 軍官이다.
역주16 成倅(성채) : ?~260. 魏(三國)나라의 무장으로, 아우 成濟와 함께 司馬昭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17 陳群 : ?~237. 魏(三國)나라의 대신으로, 字는 長文, 시호는 靖侯이다. 그는 東漢 말기의 명사 陳寔의 손자이자 陳紀의 아들이며, 九品官人制를 만들었다.
역주18 傅暢의 ≪晉諸公敍贊≫ : 부창(?~330)은 北地 泥陽 사람으로, 字는 世道이며, 조부는 魏(三國)나라의 太常 傅嘏, 부친은 靈州公 傅祗이다. 그는 西晋에서 司徒를 역임한 뒤 秘書丞에 이르고 封武鄕亭侯에 봉해졌으며, 後趙의 石勒이 서진을 멸망시킨 뒤에 그를 大將軍右司馬로 삼았다. ≪진제공서찬≫은 진나라 王公과 大臣의 傳記이며 뒤에 論贊하는 말이 있다. 원본은 산실되었고, 淸나라 黃奭의 輯本과 傅以禮의 집본이 있다.
역주19 荀顗(순의) : ?~274. 荀彧의 아들로, 字는 景倩, 시호는 康公이다. 魏(三國)나라에서 벼슬하여 臨淮公에 봉해졌으며, 晉나라에 들어와서는 侍中과 太尉를 역임하였다.
역주20 지금은……못합니다 : 荀顗(순의)는 司馬氏에게 아부하지만, 자신(陳泰)은 魏나라에 충성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21 어떤……주겠소 : 본래는 벗 사이에 이별할 때 서로 권면하는 말을 해주는 것을 이른다. 子路가 魯나라를 떠나가면서 顔淵에게 “무슨 말을 나에게 해줄 것인가?[何以贈我]” 하고, 안연이 자로에게 “무슨 말로 나에게 처신하는 방도를 일러 줄 것인가?[何以處我]” 하였다.(≪禮記≫ 〈檀弓 下〉)
역주22 (文)[士] : 저본에는 ‘文’으로 되어 있으나, ≪三國志≫ 〈魏志 諱髦傳〉에 의거하여 ‘士’로 바로잡았다.
역주23 陳群은……것이다 : 漢나라를 저버리고 曺操에게 벼슬하여 尙書에 이르렀고, 曹丕 때에는 侍中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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