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기상시散騎常侍왕업王業을 불러 ‘사마소司馬昭의 〈찬탈하려는〉 마음은 행인들도 아는 바입니다. 나는 앉아서 폐위되는 치욕을 당할 수 없으니 오늘 마땅히 그대들과 함께 직접 나가서 그를 토벌해야겠소.’ 하였다. 왕경이 〈안 된다고〉 간했으나 듣지 않고, 마침내 가슴속에 품고 있던 판령板令(조령詔令)을 꺼내 땅에 내던지면서 ‘거행하는 것은 결정되었소. 설령 죽더라도 무엇이 한스럽겠소. 게다가 반드시 죽는다고도 할 수 없소.’ 하였다. 이에 〈태후궁太后宮에〉 들어가 〈모친인〉 태후(명제明帝조예曹叡의 비 곽황후郭皇后)에게 아뢰었다. 왕침과 왕업이 다급히 달려가 사마소에게 고발하니 사마소가 그에 대해 방비하였다. 조모가 마침내 동복僮僕 수백 명을 거느리고 요란히 북을 울리면서 출병하였다. 사마소의 아우인 둔기교위屯騎校尉
에서 조모를 만났는데, 〈조모의〉 좌우가 그를 꾸짖자 사마주의 무리들이 다급히 달아났다. 중호군中護軍가충賈充이 또 조모를 맞이하여 남쪽 궐문 아래에서 싸웠는데, 조모가 직접 칼을 휘두르자 〈가충의〉 무리들이 물러서려 하였다. 태자사인太子舍人성제成濟가 가충에게 ‘사태가 다급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으니, 가충이 ‘공(사마소)께서 너희들을 기른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니, 오늘의 일은 물을 바가 없다.’ 하자, 성제가 즉시 앞으로 나아가 조모를 찔렀는데 그 칼날이 등으로 나왔다.”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말하였다. “황제(조모)가 장차 대장군(사마소司馬昭)을 죽이기 위하여 유사有司(담당 관리)에게 조서를 내려 다시 〈그의〉 지위를 상국相國으로 승진시키고
의 아우 성제가 창을 들고 돌진하여 황제는 전란 속에서 붕어하였다. 그때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깜깜해졌다.”사마문왕司馬文王(사마소司馬昭)이 시중侍中진태陳泰에게 물었다.注+②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진태전陳泰傳〉에 말하였다. “진태는 자字가 현백玄伯으로, 사공司空
에 말하였다. “가충賈充은 자字가 공려公閭로, 양릉襄陵 사람이다. 부친 가규賈逵는 위魏(삼국三國)나라에서 예주자사豫州刺史를 역임하였다. 가충은 상서尙書에 기용되고 정위廷尉로 승진하였고, 진晉나라가 〈위나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은 뒤에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졌다.”
사마문왕이 말하였다.
“그보다 조금 낮출 수 있겠소?”
〈진태가〉 대답하였다.
“다만 그 이상(군주를 시해한 죄)을 알 뿐, 그 이하는 알지 못합니다.”注+④ 간보干寶의 ≪진기晉紀≫에 말하였다. “고귀향공高貴鄕公(조모曹髦)이 살해된 뒤에 사마문왕司馬文王(사마소)이 조정의 신료들을 불러 그 대책을 논의했는데, 태상太常진태陳泰가 오지 않았다. 그의 외숙부
’ 하니, 〈진태가〉 ‘가충賈充을 죽임으로써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 대답하였다. 사마문왕이 ‘나를 위하여 그 다음 방책을 다시 생각해주시오.’ 하니, 진태가 ‘단지 이보다 더 한 것이 있을 뿐, 그 다음 방책은 모르겠습니다.’ 대답하자, 사마문왕이 그제야 〈질문을〉 멈추었다.”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에 말하였다 “조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사마소가 듣고는 자신의 몸을 땅에 내던지면서 ‘천하가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백관을 불러 그 대책을 논의하였다. 사마소가 눈물을 흘리면서 진태에게 ‘나에게 어떤 〈해결〉 방안을 주겠소?’ 하니, 진태가 ‘공께서는 다방면으로 몇 세대를 보좌하여 공적이 천하를 뒤덮으니, 옛날 현인과 자취를 함께하고 후대에 훌륭함이 전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군주를 시해한 사건이 발생했으니 또한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속히 가충을 참수한다면 그런대로 스스로를 해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소가 ‘공려公閭(가충)는 죽일 수 없소. 그대는 다른 계책을 다시 생각해주시오.’ 하니, 진태가 언성을 높이면서 ‘생각건대, 단지 이보다 더 한 것이 있을 뿐, 나머지는 권할 만한 계책이 없습니다.’ 하고는 〈집에〉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말하였다. “진태가 대장군(사마소)에게 가충을 죽이라고 권하니, 대장군이 ‘그대는 그 이외의 방책을 다시 생각해주시오.’ 하자, 진태가 ‘어찌 저에게 다시 뒷말을 하도록 하십니까?’ 하고는 마침내 피를 토하고 죽었다.”
역주2齊王(曹芳) :
232~274. 魏(三國)나라 明帝(曺叡)의 양자가 되어 뒤를 이었는데, 재위 15년 만에 司馬師에게 폐위되어 齊王이 되었다.
역주3習鑿齒의 ≪漢晉春秋≫ :
습착치(317~384)는 襄陽 사람으로, 字는 彦威이다. 桓温의 從事․西曹主簿가 되었는데, 환온의 簒位 계획에 반대하여 户曹參軍으로 좌천되었고, 이후에 滎陽太守를 역임하였다. 그는 玄學․佛學․史學에 정통하였고, 저서로 ≪漢晉春秋≫, ≪襄陽耆舊記≫, ≪逸人高士傳≫, ≪習鑿齒集≫ 등이 있다. ≪한진춘추≫는 漢 光武帝로부터 晉 愍帝에 이르는 281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했는데, 蜀漢을 정통으로 인정하여 魏나라를 배제하고 진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했다고 하였다.
역주16成倅(성채) :
?~260. 魏(三國)나라의 무장으로, 아우 成濟와 함께 司馬昭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17陳群 :
?~237. 魏(三國)나라의 대신으로, 字는 長文, 시호는 靖侯이다. 그는 東漢 말기의 명사 陳寔의 손자이자 陳紀의 아들이며, 九品官人制를 만들었다.
역주18傅暢의 ≪晉諸公敍贊≫ :
부창(?~330)은 北地 泥陽 사람으로, 字는 世道이며, 조부는 魏(三國)나라의 太常 傅嘏, 부친은 靈州公 傅祗이다. 그는 西晋에서 司徒를 역임한 뒤 秘書丞에 이르고 封武鄕亭侯에 봉해졌으며, 後趙의 石勒이 서진을 멸망시킨 뒤에 그를 大將軍右司馬로 삼았다. ≪진제공서찬≫은 진나라 王公과 大臣의 傳記이며 뒤에 論贊하는 말이 있다. 원본은 산실되었고, 淸나라 黃奭의 輯本과 傅以禮의 집본이 있다.
역주19荀顗(순의) :
?~274. 荀彧의 아들로, 字는 景倩, 시호는 康公이다. 魏(三國)나라에서 벼슬하여 臨淮公에 봉해졌으며, 晉나라에 들어와서는 侍中과 太尉를 역임하였다.
역주20지금은……못합니다 :
荀顗(순의)는 司馬氏에게 아부하지만, 자신(陳泰)은 魏나라에 충성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21어떤……주겠소 :
본래는 벗 사이에 이별할 때 서로 권면하는 말을 해주는 것을 이른다. 子路가 魯나라를 떠나가면서 顔淵에게 “무슨 말을 나에게 해줄 것인가?[何以贈我]” 하고, 안연이 자로에게 “무슨 말로 나에게 처신하는 방도를 일러 줄 것인가?[何以處我]” 하였다.(≪禮記≫ 〈檀弓 下〉)
역주22(文)[士] :
저본에는 ‘文’으로 되어 있으나, ≪三國志≫ 〈魏志 諱髦傳〉에 의거하여 ‘士’로 바로잡았다.
역주23陳群은……것이다 :
漢나라를 저버리고 曺操에게 벼슬하여 尙書에 이르렀고, 曹丕 때에는 侍中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