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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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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祥事後母朱夫人甚謹注+① 晉諸公贊曰 “祥, 字休徵, 瑯琊臨沂人.” 祥世家曰 “祥父融, 娶高平薛氏, 生祥. 繼室以廬江朱氏, 生覽.” 晉陽秋曰 “後母數譖祥, 屢以非理使祥, 弟覽輒與祥俱. 又虐使祥婦, 覽妻亦趨而共之. 母患, 方盛寒冰凍, 母欲生魚, 祥解衣, 將剖冰求之, 會有處冰小, 魚出.” 蕭廣濟孝子傳曰 “祥後母忽欲黃雀炙. 祥念難卒致, 須臾有數十黃雀飛入其幕. 母之所須, 必自奔走, 無不得焉, 其誠至如此.”이라 家有一李樹한대 結子殊好하니 母恒使守之 時風雨忽至하니 祥抱樹而泣注+② 蕭廣濟孝子傳曰 “祥後母庭中有李, 始結子, 使祥晝視鳥雀, 夜則趨鼠. 一夜風雨大至, 祥抱泣至曉, 母見之惻然.”하다
祥嘗在別牀眠할새 母自往闇斫之 值祥하여 空斫得被 既還 知母憾之不已하고 因跪前請死하니 母於是感悟하여 愛之如己子注+③ 虞預晉書曰 “祥以後母故, 陵遲不仕. 年向六十, 刺史呂虔檄爲別駕, 時人歌之曰 ‘海沂之康, 寔賴王祥, 邦國不空, 別駕之功.’ 累遷太保.”하다
【頭註】
劉云 “六十而仕, 不害爲太保.”


1-23 왕상王祥은 계모 주부인朱夫人을 지극히 정성스럽게 섬겼다.注+에 “왕상王祥은 자가 휴징休徵이고 낭야瑯琊 임기臨沂 사람이다.” 하였다.
왕상세가王祥世家≫에 “왕상의 부친은 왕융王融이며 고평高平 설씨薛氏에게 장가들어 왕상을 낳았다. 계실繼室여강廬江 주씨朱氏에게서 왕람王覽을 낳았다.” 하였다.
에 말하였다. “계모가 자주 왕상을 무고誣告하였고 누차 이치에 맞지 않게 왕상을 부렸는데 아우인 왕람이 그때마다 왕상과 같이하였다. 또 왕상의 처를 혹독하게 부렸는데 왕람의 처 역시 따라가 함께 일했다. 계모가 병이 났을 때 마침 엄동설한이라 얼음이 얼었는데 계모가 생선을 원하자 왕상이 옷을 벗고 얼음을 깨뜨려 생선을 구하려 하였다. 마침 얼음이 조금 녹은 곳이 있어 생선이 나왔다.”
에 말하였다. “왕상의 계모가 갑자기 참새구이를 원하였다. 왕상이 참새들을 갑자기 구해 바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는데 얼마 뒤에 수십 마리의 참새들이 장막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왕상은〉 모친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직접 달려가 구해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 정성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다.”
집에 오얏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과실이 매우 탐스럽게 열리자 계모가 왕상에게 항상 그 나무를 지키게 하였다. 어느 날 비바람이 갑자기 불자 〈과실이 떨어질까 봐〉 왕상이 나무를 끌어안고서 울었다.注+소광제蕭廣濟의 ≪효자전孝子傳≫에 말하였다. “왕상의 계모가 사는 집 마당에 오얏나무가 있었는데 과실이 열리기 시작하자 왕상을 시켜 낮에는 새들이 쪼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쥐를 쫓게 하였다. 어느 날 밤 비바람이 세차게 불자 왕상이 날이 밝을 때까지 〈나무를〉 끌어안고 우니, 계모가 그 모습을 보고 측은하게 여겼다.”
왕상이 한번은 별상別牀에서 자고 있는데 계모가 직접 와서 몰래 베어 죽이려 하였으나 마침 왕상이 일어나 소변을 보러 가는 바람에 공연히 이불만 베었다. 왕상이 돌아와 계모의 원한이 그지없다는 것을 알고는 계모에게 무릎을 꿇고 죽여줄 것을 청하였다. 계모가 이에 감동하여 뉘우치고 자기 자식처럼 그를 사랑하였다.注+에 말하였다. “왕상이 계모 때문에 벼슬하지 못하였다. 나이 60세가 될 무렵 당시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가 편안한 것은 실로 왕상 덕분이요, 방국邦國이 텅 비지 않은 것도 별가別駕의 공이로다.’ 하였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태보太保에 이르렀다.”
두주頭註
유신옹劉辰翁:60세에 벼슬하여도 태보太保가 되기에 지장이 없다.


역주
역주1 晉諸公贊 : 西晉의 傅暢이 편찬하였고, 22권이다. 晉나라의 王公․大臣의 傳記이며 뒤에 論贊하는 말이 있다. ≪晉諸公敍贊≫이라고도 한다. 원본은 산실되었고, 지금 淸나라 때 黄奭과 傅以禮가 각각 집록한 辑本이 있다. 傅暢(?~330)은 字가 世道이고, 西晉 말에 後趙의 관원이었다. 서진의 司徒인 傅祗의 아들이고, 曹魏의 太常인 傅嘏의 손자이다. 이 책 외에 ≪公卿故事≫ 9권을 편찬하였다.
역주2 晉陽秋 : 東晉의 孫盛이 편찬한 책으로 32권이며 서진과 동진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원본은 산실되었고 지금 輯本이 남아 있다. 孫盛(302~374)은 字가 安国이고, 太原 中都(지금의 山西 平遙) 사람이다. 대대로 仕宦한 가문 출신으로, 조부 孫楚는 馮翊太守, 부친 孫恂은 颍川太守를 지냈다. 관직이 長沙太守, 秘書監 给事中에 이르렀다. 이 책 외에 ≪魏氏春秋≫ 20권, 文集 10권이 있다.(≪晉書≫ 〈孫盛傳〉)
역주3 蕭廣濟의 ≪孝子傳≫ : ≪孝子傳≫은 晉나라 때 蕭廣濟가 15권으로 편찬하였다. 원본은 散失되었고 淸나라 때 陶方琦가 집록한 輯本 1권이 있다. 宋代에 王欽若 등이 편찬한 ≪册府元龜≫ 〈國史部〉에 “蕭廣濟는 輔國將軍을 지냈고, 孝子傳 5卷을 편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역주4 虞預의 ≪晉書≫ : 晉나라 散騎常侍를 지낸 虞預가 편찬한 私撰 史書로, ≪唐書≫ 〈藝文志〉에 58권이라고 하였다. 虞預는 字가 叔寧이고, 본명은 ‘茂’인데 후에 ‘預’로 개명하였다. 會稽 餘姚(지금의 浙江 紹興) 사람이다. 이외에 ≪會稽典錄≫ 20편을 편찬하였다.(≪晉書≫ 〈虞預傳〉)
역주5 지체되어 : 저본에는 ‘陵遲’로 되어 있는데, 이는 ‘淹滯’와 같은 뜻으로 ≪晉書≫ 〈卞壺傳〉에 “여러 해 동안 지체되다.[陵遲積年]”라 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역주6 刺史……삼으니 : 王祥이 徐州刺史 呂虔의 부름을 받아 그의 別駕가 되자 여건이 州事를 일체 왕상에게 위임하였다. 마침 그 지역에 도적이 극성하였으므로 왕상이 친히 병사들을 거느리고 독려하여 자주 도적을 토벌하니 온 고을이 조용해지고 政化가 크게 행해졌다.(≪晉書≫ 〈王祥傳〉)
역주7 海沂 : 徐州를 말한다. 서주의 땅이 동쪽으로 바다[海]에 닿고 서쪽으로 泗水와 沂水에 이어졌으므로 이렇게 불렀다.(≪世說音釋≫)
역주8 (鮮)[解] : 저본에는 ‘鮮’으로 되어 있으나, 淩瀛初 校訂本 ≪世說新語≫와 張懋辰 교정본 ≪세설신어≫에 의거하여 ‘解’로 바로잡았다.
역주9 私起 : 한밤중에 일어나 小便을 보는 것이다. ‘私’는 소변을 뜻한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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