衛子許
注+① 先賢行狀曰 “衛玆, 字子許, 陳留襄邑人. 不爲詭激之行, 不徇流俗之名, 明慮淵深, 規略宏遠. 爲車騎將軍何苗所辟. 司徒楊彪再加旌命. 漢室傾蕩, 曹公到陳留, 與玆相見, 同議起兵, 玆曰 ‘亂生久矣, 非兵無以整之.’ 由是首讚洪謀, 從太祖入滎陽, 力戰終日, 失利而歿.”弱冠
에 與同郡圏文生
으로 同稱盛德
이라 郭林宗
이 與二人
으로 俱到市
러니 子許
는 買物
에 隨價讐直
하고 文生
은 訿呵
하여 減價乃取
하니 林宗曰
子許는 少欲이요 文生은 多情이라 此二人은 非徒兄弟요 乃父子也라하다
後
에 文生
은 以穢貨
로 見捐
하고 子許
는 以烈節
로 致譽
注+② 如此看人, 尙在皮毛.라
14-4
가
注+① 에 말하였다. “위자衛玆는 자字가 자허子許이고, 진류陳留 양읍襄邑 사람이다. 남을 속이거나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포부가 분명하고 생각이 깊었다. 거기장군 하묘何苗에게 초빙되었고 사도 양표楊彪가 재차 을 보냈다. 한漢나라가 기울어 위태로울 때 조공曹公(조조曹操)이 진류에 이르러 위자와 서로 만나 함께 군대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는데, 위자가 말하기를, ‘난리가 일어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군대가 아니면 어떻게도 이를 평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큰 계획에 앞장서 참여하여 태조(조조)를 따라 형양滎陽에 들어가 종일토록 힘써 싸우다가 실패하여 죽었다.” 스무 살 무렵에 같은
군郡 사람인
권문생圏文生과 함께 덕이 높은 사람으로 불렸다.
이 두 사람과 함께 시장에 갔는데, 위자허는 물건을 살 때 값에 따라 온전한 값을 주었고, 권문생은 비싸다고 나무라며 값을 깎아서 샀다. 곽임종이 말하였다.
곽태郭泰
“
이 두 사람은 단지 형과 아우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격이다.”
나중에 권문생은
탐오貪汚로 인해 버림을 받았고, 위자허는 훌륭한 절개로 명예를 얻었다.
注+② 이와 같이 사람을 보는 것은 오히려 표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