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보補】
왕충王充이 ≪
논형論衡≫을 저술하여 완성했는데, 중원지역에서는 아직 전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注+① 원산송袁山松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하였다. “왕충王充은 자字가 중임仲任으로, 회계會稽의 상우上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태학太學에 입학한 뒤에 천자가 벽옹辟雍(천자의 태학)에 행차하는 것을 보고는 〈육유론六儒論〉을 지었다.”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하였다. “〈왕충과 동향인〉 사이오謝夷吾가 장제章帝에게 왕충을 추천하면서 ‘왕충의 천부적인 재능은 배움으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비록 전시대의 맹가孟軻(맹자孟子)와 순경荀卿(순자荀子), 근세의 양웅揚雄․유향劉向․사마천司馬遷이라도 그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채중랑蔡中郞(
채옹蔡邕)이
강동江東에 가서 그 책을 얻고는 훌륭한 문장이라고 감탄하여 항상 비밀리에 읽음으로써
담론談論의 보조자료로 삼았다. 〈채중랑이〉 북쪽으로 돌아왔을 때 여러 공들은 그의 담론 수준이 훨씬 높아졌다고 느꼈는데, 〈채중랑의〉 장막 안을 뒤졌더니 과연 ≪논형≫ 한 부가 발견되었다.
注+② 원산송袁山松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하였다. “그 이후에 왕랑王朗이 회계태수會稽太守가 되어 또 ≪논형論衡≫을 얻어 〈탐독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의 재주가 향상되었다고 칭찬하였다. 혹자가 ‘신이神異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면 특이한 책을 얻은 것이 틀림없다.’ 하고는 왕랑에게 물었더니, 과연 ≪논형≫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포박자抱朴子≫에 말하였다. 왕충王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