路巖
注+① 唐書曰 “巖, 字魯瞻, 陽平冠氏人. 祖季, 諫議大夫. 父群, 精經學, 志行貞潔, 爲翰林學士. 巖幼聰敏過人, 登大中進士, 以戶部侍郞同平章事, 年始三十六.”이 佐崔鉉於淮南
하여 爲支使
注+② 劉昫唐書曰 “崔鉉, 字台碩, 義成節度使元略子也. 累官戶部侍郞, 會昌末, 以本官平章事爲同列李德裕所嫉, 罷相.”일새 鉉知其必貴
라 嘗曰
路十
은 終須作彼一官
注+③ 胡三省通鑑注曰 “謂作相也.”이리라하다
旣而入爲監察御史하여 不出長安城十年에 至宰相이라 其入翰林日에 鉉猶在淮南이라가 聞之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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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路巖이
注+① ≪당서唐書≫ 〈노암전路巖傳〉에 말하였다. “노암路巖은 자字가 노첨魯瞻이고, 양평陽平 관씨冠氏 사람이다. 조부 노계路季는 간의대부諫議大夫였다. 부친 노군路群은 경학經學에 정통하였고 뜻이 바르고 행실이 고결하였으며 한림학사를 지냈다. 노암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총명하고 기민하였다. 에 올랐고 호부시랑동평장사戶部侍郞同平章事가 되었을 때가 겨우 36세였다.” 회남淮南에서
최현崔鉉을 보좌하여
로 있을 때,
注+② 유후劉昫의 ≪당서唐書≫에 말하였다. “최현崔鉉은 자字가 태석台碩이고, 의성절도사義成節度使 최원략崔元略의 아들이다. 여러 번 승진하여 호부시랑에 이르렀다. 회창會昌(841~846) 말에 로서 동료 이덕유李德裕의 시기를 받아 재상에서 파직되었다.” 최현은 그가 반드시 귀하게 될 줄 알았다. 한번은 말하였다.
“
노십路十(노암)은 나중에 재상이 될 것이다,”
注+③ 호삼성胡三省의 ≪자치통감資治通鑑≫주注에 말하기를, “〈일관一官은〉 재상이 되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노암이〉 얼마 뒤 감찰어사로 들어가서
장안성長安城을 나가지 않고 10년 만에 재상이 되었다. 그가
에 들어간 날 최현은 여전히 회남에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노십路十이 지금 벌써 한림원에 들어갔으니 어찌 〈한림원에서〉 늙겠는가.” 나중에 모두 최현이 말한 대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