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①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말했다. “옛날 주周나라의 도道가 융성했을 때 소백召伯이 조정에 있었는데 유사有司가 백성들을 소환하기를 청하자, 소백이 ‘나 한사람 때문에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나의 선군先君이신 문왕文王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팥배나무 아래에서 위를 가릴 지붕도 없이 있으면서 송사를 처리하였다. 시인詩人이 소백이 휴식을 취하던 팥배나무를 보고 찬미하며 노래하기를 ‘무성한 팥배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이 노숙하셨던 곳이니라.’라고 하였다.”
역주4畝 :
‘묘’는 면적의 단위로 혹자에 따라서 대략 지금의 30평 또는 600제곱미터 정도라고 하나 정확한 넓이는 알 수 없다. 周나라 때에는 6尺이 1步이고 100步가 1畝였고, 秦나라와 漢나라 때에는 5尺이 2步, 240步가 1畝였으며, 唐나라 때에는 너비 1步에 길이 240步가 1畝였다.
역주5有司請召民 :
≪韓詩外傳≫에는 ‘有司請營邵以居(유사가 소읍에 집을 짓고 거처하도록 요청하였다.)’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