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裴國寶注+① 晉諸公贊曰 “裴瓚, 字國寶, 楷之子. 才氣爽雋, 終中書郎.”注+② 世說曰 “正始中, 人士比論, 以五荀方五陳, 八裴方八王, 以裴瓚方王敦.” 是裴叔則子 風神高邁일새 特爲王萬子所重하니 每從之遊 萬子父安豐 謂之曰
國寶 初不來어늘 汝那得數往고하니
萬子曰
國寶 雖不知綏自知國寶니이다하다


26-3 【배국보裴國寶(배찬裴瓚)는注+부창傅暢의 ≪진제공서찬晉諸公敍贊≫에 말하였다. “배찬裴瓚국보國寶로, 배해裴楷의 아들이다. 재능이 뛰어나고 기백이 훌륭했으며, 중서랑中書郎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注+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에 말하였다. “〈삼국三國 정시正始 연간(240~249)에 인사들이 〈인물을〉 비교․논평하면서 에 견주고 에 견주었는데, 배찬裴瓚에 견주었다.” 배숙칙裴叔則(배해裴楷)의 아들로, 풍모가 고매했기 때문에 특히 왕만자王萬子에게 존중을 받았으니 〈왕만자가〉 매번 그를 찾아가 종유하였다. 왕만자의 부친 왕안풍王安豐이 〈왕만자에게〉 말하였다.
“배국초는 애초에 〈너를 찾아〉 온 적이 없거늘 너는 어찌 자주 〈그를〉 찾아가느냐?”
왕만자가 말하였다.
“배국보는 비록 저를 알아주지는 않지만, 저는 본래 배국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주
역주1 五荀 : 後漢 말기부터 西晉에 이르기까지 명성을 떨쳤던 荀淑․荀靖․荀爽․荀彧․荀顗를 이른다.
역주2 五陳 : 後漢 말기부터 三國 魏에 이르기까지 명성을 떨쳤던 陳寔․陳諶․陳紀․陳羣․陳泰를 이른다.
역주3 八裴 : 三國 魏로부터 西晉에 이르기까지 명성을 떨쳤던 裴徽․裴楷․裴康․裴绰․裴瓚․裴遐․裴頠(배외)․裴邈을 이른다.
역주4 八王 : 魏晉시대 晉에서 명성을 떨쳤던 王祥․王衍․王绥․王澄․王敦․王导․王戎․王玄을 이른다.
역주5 王敦 : 266~324. 瑯琊郡 臨沂縣 사람으로, 字는 處仲이고, 어릴 때 이름은 阿黑이다. 사촌 아우 王導와 함께 元帝를 보좌하여 東晉을 건립하고, 大將軍․江州牧이 되고 漢安侯에 봉해졌다. 원제 永昌 元年(322)에 자신의 반대파인 劉隗(유외)를 주벌한다는 명분으로 武昌에서 거병하여 建康을 공격하여 반대파를 제거한 뒤 丞相이 되고 武昌郡公이 되었다. 무창으로 돌아온 뒤, 明帝 太寧 2년(324) 다시 건강을 공격했는데 오래지 않아 軍中에서 병사하였다.
역주6 만나는……표했는데 : 원문에는 없는데, 해석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何氏語林≫에 있는 ‘見者無不脩敬’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역주7 王綏 : 琅琊郡 臨沂縣 사람으로, 字는 萬子이고 王萬이라고도 불리었으며, 王戎의 아들이다. 그는 젊을 때부터 훌륭한 명성을 지녔는데, 매우 뚱뚱하여 왕융이 쌀겨를 먹으라고 했으나 그는 더욱 뚱뚱해졌다. 太尉掾에 임명되었는데, 임명장을 받기 전에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역주8 王戎 : 234~305. 西晉 琅琊郡 臨沂縣 사람으로, 字는 濬沖이며, 涼州刺史 王渾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명성이 자자했고, 후에 竹林七賢의 일원이 되었다. 많은 관직을 역임하고, 趙王 司馬倫이 반란을 일으켜 惠帝의 황후였던 賈氏와 그 일파를 죽였는데, 왕융의 사위 裴頠(배외)가 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왕융 또한 이에 연좌되었지만 죽지 않고 면직당했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