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恭
이 從會稽還
注+① 周祗隆安記曰 “恭, 字孝伯, 太原晉陽人. 祖父蒙, 司徒左長史, 風流標望. 父蘊, 鎭軍將軍, 亦得世譽.” 恭别傳曰 “恭, 清廉貴峻, 志存格正, 起家著作郎, 歷丹陽尹․中書令, 出爲五州都督․前將軍․靑兗二州刺史.”하니 王大看之
注+② 王忱, 小字佛大. 晉安帝紀曰 “忱, 字元達, 平北將軍坦之第四子也. 甚得名於當世. 與族子恭少相善, 齊聲見稱. 仕至荊州刺史.”에 見其坐六尺簟
하고 因語恭
하되
恭無言하고 大去後에 即擧所坐者하여 送之라 既無餘席에 便坐薦上하다 後에 大가 聞之하고 甚驚曰
1-52
왕공王恭이
회계會稽에서 돌아오자
注+① 주지周祗의 ≪융안기隆安記≫에 말하였다. “왕공王恭은 자가 효백孝伯이고 태원太原 진양晉陽 사람이다. 조부 왕몽王蒙은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였는데 풍류風流로 이름이 높았다. 부친 왕온王蘊은 진군장군鎭軍將軍이었는데 그 역시 당대의 명성을 얻었다.”
〈왕공별전王恭别傳〉에 말하였다. “왕공은 청렴하고 고귀한 기품이 있고 세상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저작랑著作郞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단양윤丹陽尹과 중서령中書令을 지냈으며 외직에 나가 오주도독五州都督․전장군前將軍․청주자사靑州刺史․연주자사兗州刺史를 지냈다.” 왕대王大(
왕침王忱)가 그를 방문하였는데,
注+② 왕침王忱은 어릴 적 자字가 불대佛大이다. ≪진안제기晉安帝紀≫에 말하였다. “왕침은 자가 원달元達이고 평북장군平北將軍 왕탄지王坦之의 넷째 아들이다. 당대에 매우 이름이 높았다. 친척 조카인 왕공王恭과 젊어서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함께 명성이 높았고 칭찬을 받았다. 벼슬이 형주자사荊州刺史에 이르렀다.” 그가 앉은 6자[
척尺]짜리 대자리를 보고는 왕공에게 말하였다.
왕공이 아무 말도 없다가 왕대가 가고 난 뒤 즉시 깔고 앉았던 대자리를 거둬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여분의 자리가 없어 짚방석을 깔고 앉았다. 나중에 왕대가 듣고는 매우 놀라면서 말하였다.
“나는 실은 경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달라고 한 것이네.”
“장인丈人께서는 저를 잘 알지 못하시는군요. 저라는 사람은 여분의 물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注
◦ 유진옹劉辰翁:긴요함은 없으나 식견과 도량이 있다.
注
◦ 유신옹劉辰翁:〈무장물無長物은〉 단지 대자리가 하나만 있고 여분의 대자리가 없음을 말한다.